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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백운사보현전

꿈꾸는 세상살이 2011. 5. 4. 20:52

76. 백운사보현전

 
▲ 백운사큰법당 
사찰의 대웅전을 여기서는 큰법당이라고 한다. 물론 대웅전이나 큰법당이나 같은 뜻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굳이 우리말로 쓴 사찰은 아직 처음이다.

백운사는 여산면 호산리 65번지에 있는 작은 사찰로 천호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로, 신라 경순왕2년 928년에 백양선사가 세웠다고 하나 전하는 기록은 없다. 창건 당시에는 법당산(法幢山) 혜정사(慧定寺)라 하였으나 언제부터인지 백운사로 불리게 되었다. 이 백운사에 있는 보현전이 1984년 4월 1일에 문화재자료 제90호로 지정되었다.

백운사 보현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건축물로 팔작지붕을 하였었다. 그러나 보현전이 1995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으니, 현재는 관음전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었다. 이 관음전에는 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있다. 따라서 예전의 보현전은 1996년 3월 29일 문화재지정에서 해지되었다.

원래 보현전에는 후불탱화와 지장탱화, 그리고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었는데, 후불탱화에는 ‘함풍(咸豊)8년에 인일당(仁日堂)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1858년에 만들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백운사를 찾은 날은 비가 내리다가 잠시 소강상태에 있던 한낮이었다. 작은 사찰이기도 하지만 산기슭을 다듬어 조성한 부지라서 경내가 좁은 편이다. 백운사주차장에 당도하기 전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은행나무다. 수령은 30년이나 되었고 키는 24m, 직경이 3.7m인데다 수관이 좋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넓은 그늘을 제공하는 보호수이다. 약간 경사진 비탈면에 서있어 더욱 우람해 보인다.

또한 주차장과 사찰을 구분짓는 담장도 설치되어 시끄러운 세상을 멀리하려는 의도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 담에 능소화가 피었다. 커다란 호박돌로 석축을 대신하여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세운 담이라 매우 높아 보인다. 때마침 한여름의 초록빛은 인간의 세상에서 범접할 수 없는 세상으로 가는 길을 막아놓은 듯하다.

약간 경사진 언덕을 오르니 일주문이 나온다. 이 일주문의 안쪽에 탑군이 보인다. 보통의 사찰에서 탑은 한 두 개에 지나지 않지만, 여러 개의 부도를 모아 놓은 것은 보았어도 이처럼 탑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것은 처음이다. 탑이 부도와 다른 것을 들자면 우선 크기에서 차이가 나는데, 백운사의 탑은 일반 탑중에서도 크기가 아주 큰 탑군에 속한다. 새로 건립한 탑으로 깨끗함과 신선함이 전해온다. 한 개의 탑이 1사찰이나 1부처를 의미한다고 한다면 여기 백운사는 여러 사찰의 모임체이거나 여러 부처의 모임처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창건 당시의 이름이 법당산 혜정사라 하였다 하더니, 이제라도 정말 법당(法幢)의 역할을 하려나보다.

주차장이 넓지는 않지만 옆의 불소루(佛笑樓) 마당까지 차량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무슨 행사가 있는 것은 분명하였다. 언덕배기를 올라서니 마당안에는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요란한 목탁소리만 산골짜기를 울린다. 그래도 예의바른 종무소 직원이 뛰어나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다. 내가 여러 사찰을 방문하여 보았지만 이렇게 친절하기는 처음이었다.

문화재인 백운사보현전을 보러왔다고 말하자, 그는 관리를 잘 하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관람하는 사람들이나 신도들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도 강조를 하였다. 안타깝게도 화재로 소실되어 문화재에서 지정해지 되었지만,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화재안내판이 위안을 준다.

그러는 때에 사찰내의 전 직원은 ‘큰법당’에 모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백운사에서는 대웅전을 큰법당이라고 부르고 현판도 그렇게 달았다. 종무소 직원도 모두 모이라는 명령에는 미적미적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가보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나를 마치 자기네 행사에 참석하는 신자인줄 알았었나보다. 시계는 정확히 12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사찰을 방문한 사람에게 점심을 공양할 생각은 안하고 자기들 볼일만 보는 것은 어딘지 좀 서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나 혼자보다 많은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을 먼저 하여야 하였으니 행사 주최측의 그 행동이 옳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사찰이 산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억불숭유정책으로 민가에 있던 사찰이 박해를 피해 산으로 숨어든 때문이다. 이때부터 절은 산속에 있어야 제 맛이 났고, 산세가 좋고 경치가 좋은 곳에는 으레 사찰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산불이 나도 험한 산세에 눌려 화재진압이 어려웠고, 자칫 인근에 있던 사찰마저 소실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그러나 사찰이 화재에 취약한 것은 교통이 불편한 탓도 있지만, 전통가옥이 불에 약한 부재료를 사용하는 데서 기인하는 문제가 더 크다. 그렇다고 전통을 무시하고 편리한데로 고쳐나가면 우리 전통이 끊어질 위험도 있으니 다른 방법이 없이 목조건물은 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더 기울여야만 한다.

2005년 4월 5일 양양산불로 천년고찰 낙산사가 소실되어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79호로 지정된 낙산사동종이 2005년 7월 7일 문화재지정에서 해지되었다. 1986년 12월 6일 금산사의 대적광전이 원인모를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88년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이 대적광전은 보물 제476호에서 1987년 1월 10일 해지되었다. 또 1968년 2월 19일 화재로 전소된 보물 제458호 쌍계사적묵당도 1968년 12월 16일 해지되었다.

이 외에도 전국적으로 유명문화재가 소실되어 문화재지정에서 해지된 경우를 보면 국보 제115호 청평사극락전, 국보 제240호 보림사대웅전, 국보 제273호 관음사원통전, 국보 제404호 송광사백설당 및 청운당, 국보 제276호 진주촉석루 등이 있고, 여기에 딸린 권속이나 부장품도 상당수 존재한다. 최근인 2009년 12월 20일에는 해를 맞이하는 사찰이라는 뜻의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여수 향일암(向日庵)이 잿더미로 변했다. 물론 이러한 문화재가 모두 산불이나 실화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주는 경고성 의미는 분명하다.

이 백운사보현전도 1996년도에 문화재에서 지정해지 되었으니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따라서 당시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아직도 백운사를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없어진 문화재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사라진 우리 옛것을 더듬는 아픈 마음이기도 하다.

최근에 우리는 국보 제1호를 숭례문을 잃었다. 2008년 2월 10일 인적이 드문 야밤에 방화로 일어난 불은 순식간에 번졌고, 걷잡을 수 없는 화마(火魔)는 전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보는 앞에서 그대로 건물을 주저 앉혀버렸다. 기와에 고드름이 얼면서 그나마 형상은 유지하는가 보다고 안심하였는데, 속은 이미 텅 비어 버린 뒤였었다.

무너져 내린 숭례문은 온 국민의 염원을 모아 다시 복원한다고 말하지만, 이미 소실된 목조건물을 그대로 복원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겉은 멀쩡하였지만 속은 이미 없어져버린 숭례문이었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번지르르하지만 알맹이 없는 허울일 뿐이다. 거기다가 꺾여진 우리의 자존심은 어떻게 세워 붙일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국보 1호도 사라졌는데 이것으로 백운사보현전에 대한 위안을 삼자는 얘기가 아니다. 기왕에 발생한 일이라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을 하자는 것이다. 똑같은 일을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어려워서 하지 못하는 일이야 몇 번이라도 당할 수 있지만, 작고 쉬운 일을 하지 못해서 당하는 것은 정말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인근의 서천곰솔이 낙뢰를 입은 직후인 2007년 8월 망성면의 천연기념물 신작리곰솔이 낙뢰사고를 당한 것은 익산시민이 두고두고 타산지석의 표본으로 삼아야 할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