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흉터 사이의 판단
요즘 날씨가 추워지면서 관리가 소홀했던 탓인지 얼굴에 뭔가가 났다. 일반적으로 며칠 더 두면 저절로 가라앉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지만, 성질이 급한 나는 손으로 긁어댔다. 이럴 때를 두고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고 할 것이다. 아직 곪지도 않은 자리에서는 생피가 나고 피부가 붉어졌다. 그러나 그러기를 몇 차례, 얼굴을 긁어대는 손길은 벌겋게 부어오르고 맑은 피가 난 뒤에야 멈췄다.
하루가 지나자 상처 난 부위에 딱지가 앉았다. 가렵고 귀찮은 것을 애써 참으니 딱지도 떨어졌는데,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작지만 점이 하나 생겼다. 말하자면 곪으려는 부분을 빨리 치유하려 하다가 얼굴에 점이 하나 생긴 것이다. 뭐가 그리 급하기에 얼굴에 점이 생기면서까지 곪는 것을 참지 못했을까. 이것이 아마도 나의 성격인 듯하다.
이때 만약 조금 곪은 다음에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상처에 점이 생기지는 않았겠지만, 며칠 동안 곪은 모습을 하고 다녔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의 얼굴에서 곪은 상처를 보고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나는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점과 곪을 부분을 바꾼 셈이다.
우리 사회도 이제 막 곪으려는 부분이 있고, 이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할 정도로 곪아서 터질 곳도 있다. 사람들도 모두가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나와 같이 성질이 급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는 느긋하게 돌아가는 대로 시간을 두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곪아 터질 부분과 이미 곪을 대로 곪은 부분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물론 사안에 따라 다르게 처방을 해야겠지만 누렇게 곪아 떠서 보기 싫게 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것이며, 조금만 곪아도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며 바로 치유해야 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것이 옳다고 딱 잡아 말하기는 곤란하며, 상황과 형편에 따라 현명한 판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요즘 뉴스의 최대 관점은 대선에서 관권이 동원되었느냐와 일부라도 부정이 개입되었느냐이다. 그런데 매스컴에서 발표되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상당부분 관권이 포함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면 이것은 앞으로 곪을 부분인가 아니면 이미 곪아버린 부분일까. 내가 보기에는 후자로서 이미 곪을 대로 곪아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될 정도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국민들은 곪아서 보기 흉한 상처를 매일같이 보아왔으며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이다. 그러니 밥맛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인 식욕마저 잃을 정도가 되었다. 손가락에 가시가 박혀 곪았다면 가시를 빼어내고 피를 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상처가 커서 가시 하나 뺀 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면 상처에 거즈를 집어넣고 훑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심하면 손가락을 잘라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 난 부위가 손가락 하나에 그치지 않고 온 몸에 퍼져 있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손가락 자르고 발가락 자르고, 귀도 자르고 코도 베고, 무릎도 절단하고 이두박근과 삼두박근도 잘라내고, 허벅지와 종아리도 떼어내고 이렇게 하면 깨끗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경우를 종종 만난다. 머리가 없으며 눈과 입도 없이, 다리도 없이 몸통도 없는 사람은 이미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은 비단 사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도 하나의 생명체인 만큼 인체의 각각에 해당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따라서 계획하고 행동하며, 현실을 지탱해가는 요소들이 제 자리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의 치유는 오로지 혁신만이 답이다. 살아있는 생명체에서 가죽을 벗겨내고 뼈를 깎아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팔과 다리 등 각 지체의 근본은 그대로 두되, 상처가 생긴 피부를 완전히 벗겨내어 새 살이 차도록 한다는 논리로써 국가의 조직은 그대로 두되 그 역할을 담당하던 사람들을 모두 벗겨내어 새롭게 하는 이론이라면 맞을 것이다.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상처를 방치하는 것은 다른 곳으로의 전염을 유도하는 것이며, 자칫하면 혁신으로도 고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런 때가 되면 나라를 잃게 되거나 국민을 잃게 되는 결과가 빚어질 것이며, 이미 국가로서의 기능이 상실된 때일 것이다.
한 개인도 얼굴에 점이 하나 생기는 것쯤은 감수하고라도 상처를 빨리 치유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하물며 나라를 지도한다는 사람들에게라면 커다란 흉터가 남더라도 많은 국민을 위하여 상처를 도려내는 아픔쯤은 참아야 한다. 내 살점 하나가 아깝다고 미루다가 국민들의 몸까지 곪아터지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내 이익 하나 더 챙기다가 많은 국민들에게 손해를 끼쳐서야 되겠는가. 어차피 거쳐야 할 혁신이라면 나 혼자 혁신하는 것이 낫지, 많은 국민들의 몸을 가르고 뼈를 도려내면서 혁신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크든 작든 몸에 난 상처를 언제 치유할 것인가는 시기적으로 매우 중요한 선택이 요구된다. 하물며 언제 혁신을 하여야 할지는 물어 무엇 하겠는가. 모든 것에는 시의적절한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를 취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당사자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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