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문학관
올 가을에 고창의 미당시문학관에 다녀왔고, 남원의 혼불문학관에도 다녀왔다. 우리지역에서는 판소리의 정기발표회에도 다녀왔으며 국화축제에도 다녀왔고, 용머리권역억새축제에도 다녀왔다. 이렇게 보면 가 본 곳이 제법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가지 못한 곳이 더 많고 가보고 싶었던 곳이 더 많았던 가을이었다.
이 산 저 산 곱게 물들인 단풍이 손짓하지만 거기에 응답하지 못한 채 겨울을 맞고 말았다. 아름다운 풍경은 나의 마음을 정화하며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는데, 나는 올 해도 삶에 지치고 찌든 체 지나가는듯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단풍은 굳이 유명한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 길가의 가로수에도 정원의 한 그루 나무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면서 바라보느냐 일 것이다. 작은 정원에 가득 찬 단풍과 큰 산에 헤성 헤성한 단풍 중 어느 쪽이 더 푸짐할 것인가는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미당시문학관은 산속 시골마을의 작은 폐교에 만들어졌다. 옛 건물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달아낸 건물과 주변 부속물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비용도 그리 많이 소용되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고 위치적으로도 외진 곳이라 찾는 손님도 적은 편이다. 혼불문학관은 한옥으로 새로 지었지만 남원의 외진 산골에 있다. 이곳 역시 찾는 사람이 한정된 곳이다.
이런 환경에 비하면 우리 익산은 교통이 편리하고 거주 인구도 많은 곳임에 틀림없다. 또한 거쳐 가는 도로망도 발달하여 지나는 손님을 유치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대고 찾아갈 문학관이 없다는 것은 조금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굳이 이름을 문학관이라고 해야 문학관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어찌하든 외지인들에게 이름이 그만큼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익산에 문학관이 설립되기를 다시 한 번 기대해본다. 익산을 대표하는 문인은 시대별로 다르겠지만, 근래의 대표인물로는 가람 이병기가 단연 으뜸이다. 가람은 1891년 3월 5일 여산의 진사동에서 출생하여 1968년 11월 29일 생가에서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가람은 우리말 시조를 보급한 선구자이며, 강점기 국어사랑으로 이름을 떨치신 분이다. 그 결과 국문학적으로나 서지학적으로나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복역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군정청에서 공무를 보았고, 고향 여산의 교사생활을 시작으로 전북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등 전국의 10여 개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가람을 기리는 시비는 고향인 여산초등학교와 전주다가공원에 세워져 있다.
영웅이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가람이 익산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전국적으로는 아주 유명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내가 항상 접하고 있어 귀한 줄을 모르는 공기처럼, 친근한 가람이 중함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제 뉴스에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국립으로 승격해야 하는 타당성 조사가 나왔다고 한다. 자칫하면 익산에서 발견된 국보를 서울에 가서 보아야 했을 우려를 씻어주기에 족하다. 해외로 밀반출된 우리 문화재를 다시 돌려줄 수 없겠느냐고 구걸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러한 우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취지로 들린다.
그간 수차례 거론되었던 가람 이병기의 문학관 건립을 다시 촉구해본다.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음은, 다 내어주고 어떻게 하면 다시 돌려받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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