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아름다운 조연

꿈꾸는 세상살이 2014. 12. 20. 10:14

아름다운 조연

열린음악회가 익산에서 열렸다. 연말연시 특집 방송을 고려하여 올해 마지막 녹화라는 말로 시작된 음악회는, 문화의 변방에 서있던 시골 작은 도시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출연진도 김수희, 김종환, 정동하, 홍진영, 베스티, 레드벨벳, 김수연, 윤수일 등 잘 알려진 가수들이서 친근감이 돌았다. 게다가 오랫동안 사회를 맡아온 황수경은 출연진과 방청객 모두를 아우르는 부드러움과 우아함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화향기 가득한 10월 하순에 열린 음악회는 가을의 정취를 듬뿍 선사하였다. 마침 천만 송이 국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기간이었지만,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넓디넓은 운동장을 가득 메운 인파는 글자 그대로 초만원이었다.

어떤 사람은 방청을 위하여 낮 시간대부터 기다리는 열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산과 들로 단풍놀이를 떠나는 대신 도시락을 싸들고 와서 운동장 주변의 가을을 감상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열린음악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음악이 좋고 가수가 좋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 익산을 사랑하고 익산에서 개최되는 행사에 동참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원래 열린음악회는 글자 그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보아야 하는 음악회다. 바쁘게 쫓기는 가운데 감상하는 음악회는 진정한 음악의 묘미를 감상할 수가 없으며, 내가 좋아하는 노래나 가수를 만나는 순간의 기회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은 마치 선거 유세장에서 지지하는 후보의 연설이 끝나면 보란듯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그런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열린음악회는 모름지기 마음의 문을 열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와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들의 노래도 들어볼 줄 아는 그런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열린음악회는 사람과 사람 간의 마음의 문을 여는 음악회여야 하는 것이다.

이날 음악회는 어떤 국회의원이 많은 힘을 써서 개최하였다는 후문이 돌았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름도 열린음악회인데 꼭 그런 말까지 해서 소문을 내야 했을까 생각해본다. 진정한 일꾼이라면 주인이 시키는 일을 군소리 없이 그리고 시키지 않아도 제가 할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 도리다. 내 집의 하인이 한 가지 일을 마칠 때마다 칭찬을 들으려고 얼쩡거린다면 어서 가서 일이나 하라고 호통을 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받고자 기웃거린다면 주인의 심정을 모르는 하인임에 틀림없다.

나는 열린음악회를 개최하도록 노력한 사람을 나무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청명한 10월 29일 밤의 차가운 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칭찬하고 싶은 것이다. 그날 밤 추위에 떨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나는 언제 어디서 한 번이라도 본 적은 물론 들어 본 적도 없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는 열린음악회 공연장마다 따라다니며 가수와 관객이 하나가 되도록 유도하는 사람이다.

설정이라 하더라도 통기타를 치면서 줄을 끊어내는 기술이나, 그 과정을 중계방송하면서 노래하는 모습은 웃음을 주기에 충분하다. 자신을 소재로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관객이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 지를 가르친다. 그에게는 격식이 없다. 그러나 차분한 질서와 열정을 표출하는 순간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고음불가의 노래로 목소리가 갈라져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라, 시작하기 전에 분위기를 잡는 아름다운 조연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망가지는 몸개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개그는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수준 높은 유머다.

자기가 누구라고 말하였지만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이를 두고, 왕과 더불어 호의호식하는 탐관오리를 기억하면서 변방에서 나라를 지키는 장수를 기억하지 못함에 비유하고 싶다. 주연은 조연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아름다운 조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사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그런 친구가 될 수만 있다면 더욱 좋겠다.

'내 것들 > 산문, 수필,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판 위의 고기 한 점  (0) 2014.12.20
세계 속의 한국 그리고 한글  (0) 2014.12.20
13일의 금요일  (0) 2014.12.20
가을과 문학관   (0) 2014.12.20
상처와 흉터 사이의 판단  (0) 2014.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