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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룩한 시절, 연탄중독자를 구한 노래

꿈꾸는 세상살이 2017. 1. 14. 10:10

어수룩한 시절, 연탄중독자를 구한 노래

 

나는 현재 9층에 살고 있다. 예전, 초기에는 부모님의 슬하에서 단독주택을 살았었다.

그러다가 군을 마치고 객지생활을 하면서 독신 기숙사의 도움을 받아 5층 아파트 맨 위에 살았다. 회사 관리담당의 안내를 받은 거주지를 받아들고, 고향에서 전출신고를 하였는데 주민관련 공무원은 그런 주소가 없다는 거부를 제시하였다. 자세히 받았던 신주소를 차근차근 설명하였으나 명부를 뒤적여 보던 사람은 재차 거부반응으로 짜증을 부렸다.

고향 사정을 아는 나 역시 고향담장자의 편을 보살펴 두고 회사에게 전화를 하여 어떻게 그런 주소를 알려주었느냐는 항의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회사의 담당자는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주소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니 그렇게 정확한 전입지를 따르라는 말뿐이었다.

 

나는 짜증이 난 상태였지만 약소인 일개 국민의 입장에서, 주민등록담당에게 사정사정하면서 다시 부탁할 방법뿐이 없었다. 투정을 내는 담당자는 큰 편의를 베푼다는듯 한 투였다. 그러다 명단을 찾아보지 않고 그냥 주소를 기입하자 그렇게 그런 접수가 마무리되었다.


신 주소는 허허벌판에 대규모 공단을 조성한 곳이었으니 타지에서 전혀 알 수 없었고, 전산이 없어서 수기에 의존하나보니 주먹구구식이었다. 외지 주소는 시시각각에 업데이트되지 못한 초판을 참조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회사에 따져보았던 나는 객지 표준말을 사용하지 못하는 객지 발음과 띨띨한 탓에 구겨서 밀려났다. 그 시기는 35년 전의 일이다.


입주하였으나 결혼을 하여 기숙사를 퇴사하였다. 처음 단칸방을 월세로 옮겼다. 주인집과 6가족의 입주원이 화장실 한 칸으로 버텨내며, 튼튼한 슬래브의 알속은 천정뿐이니 여름에 고역이었다. 내가 사는 셋방의 옆문은 줄줄이 굴비 엮듯 한 구조였으며, 뒷문은 다른 뒷집의 셋방이 마주하고 있어 창문을 열 수 없으니 불가마였다.

수돗물은 주인이 홀로 사용하지만, 세입자는 공동의 야외 수도를 순서 받기가 고역이었다. 수압이 낮아서 자기가 사용하는 시간에는 공용 수돗물을 순찰하다가 수도를 켜는 순간 잠그는 전횡이 계속되었다.

전력계는 하나였으나 전기요금은 몸소 계산을 수고하면서, 일방적으로 배분하여 통보한 사람은 주인 몫이었다. 거기다 정작 자신이 전기사용량 검침원 일용직이었으나 무소불위와 전매특허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정당한 선전포고를 보내겠다는 호기를 부렸으나, 열대야 슬래브 지붕 위에 물을 뿌려대었던 것이 유일한 정당 요구의 수단뿐이다. 별도의 방이 있지만 부엌은 공동이 거주하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지 않는 상황으로 공유하는 사람도 있을 뿐이다.


이어서 발전하여, 허리를 펴고 살자는 꿈을 키웠으나 객지생활의 외로움, 전셋집에서 당한 설움, 더하여 주거 무단 침입 불청객을 버티지 못했었다.

 

사건 1주일 만에 복귀한 기숙사는 저렴한 전세제도의 배려를 받은 것이다. 아파트는 2년 만에 월세 신세를 면하게 된 것은 이를 깨물어가면서 노력한 보람이었다. 내 각오와 근면하고 모범직한 활동을 했다는 위안을 받았다.

돌이켜 보면 기숙사가 몇 채 되지 않았지만 회사 규모가 작은 회사입장에서는 종업원에 대한 엄청난 배려였다. 후임 신입사원이 기숙사에 입주할 것에 대한 눈치를 보는 것에 월세와 전세로 번갈아 옮아갔으나, 2년여 만에 다시 기숙사에 비집고 들어온 것은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가족의 배려를 받았다. 어찌 보면 특혜성 배려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2개와 작은 거실 그리고 부엌이 딸린 13평의 아파트는 나에게 궁전이었다. 부푼 꿈에 겨운 행복이었다. 큰방의 구들은 집 안에서, 작은방의 구들은 현관 밖에서 지피던 연탄이었다. 서로 부둥켜 살면서 첫겨울을 지나는데, 결로 탓에 큰방과 부엌은 곰팡이가 궁전을 차지하였으니 작은방으로 피신하게만 되었다.


아들은 터를 판 철부지였지만 부단한 나대기를 마다하였고 아내는 조신하게 지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에다 각 세대의 연탄창고를 마련하였으니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아들은 소리를 크게 질렀으나 희망이여~ 빛이여~’ 라는 소절을 반복할 뿐이었다. 현관 모든 입주자들은 아는 체를 하면서 환영하고 칭찬과 격려를 보탰으니 사람 사는 보람이 있었다.

 

설날 직전에는 강추위 탓에 나 혼자 고향을 찾았고, 가족은 이역만리 남부지역에 남아있었다. 시내버스를 한 시간 타고 가다가 열차를 갈아타는 곳은 기본이었다. 열차도 2번 교대로 타는 것과 시외버스에 발이 붕~ 떠서 가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혼자는 그래도 행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아내는 연탄중독을 맡았는데, 사지는 힘이 없으나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겨우 제 몸 가누기 힘겨웠을 아들은 득달같이 달려갔다. 5층에서 아래층의 구조자를 초청한 메신저였다.

 

아파트 골목 사람들 사이에 안면을 트고, 싸우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기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즘의 세태는 못 보는 척하다가 당하는 처지가 부지기수다. 현대는 저승사자 연탄중독의 위력은 적지만 시시각각 틈을 보다가 졸지에 방문하는 상황이 부지기수다. 심근경색과 뇌출혈이나 뇌경색이 대표적인 주적인데, 불특정 구조가 아니라 일정 특정 구조자에게 국한된다. 바쁜 세파와 얼굴을 외면하는 탓에 나의 생명을 구할 이웃과 만날 수 있을까?

 

사람의 정리와 예절에 따라서, 혹은 최소한의 무관심과 무시를 짓밟지 않아 되받을 수 있는 도움이 있을 것이다. 거기 에는 나의 이기심이 아니라 서로 돕는 것이 배려로 토출되며 되돌아 받는 은혜가 된다. 예수의 가르침 즉 절대 진리를 삼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지상낙원이리다.

2016.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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