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작은미술관을 한 곳에 모았다.
솜리골작은미술관으로...
내가 살고 있는 익산에는 솜리라는 지명이 있다. 솜리라는 뜻은 정확이 그리고 명확한 규정과 성문에 실려 있는 어원과 설명이 없다. 그저 이런 과정에 따라 바뀐 것이라는 설명도 필요 없다. 솜리는 솝리에서 변했다고 아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그 전에 속리에서 변해진 것이라고 믿는다. 속리는 한자에서 보는 속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마을이라는 뜻의 지역적인 리라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어느 테두리 안에 있는 마을 즉 속에 있는 마을이므로 속리라고 하였는데, 차츰 부르기 쉬운 단어가 변하며 문법에서 구개음화라는 이론에 따라 솝리, 솜리가 된다는 정설이다.
거기다가 이론과 한자(漢字)적인 복합적인 지명이 속리라는 이리(裡里)로 굳어졌다.
그리고 이리시와 익산군이라는 이름이 합병하여 복합도시로 되면서 익산시라고 통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솜리골작은미술관을 관람하였다. 초가을과 만추인 10월의 가을밤에.
나는 미술에 관한 관심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미술에 관한 지식도 없으며 그림 수집과 소장에 대한 관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거푸 미술관에 가게 되었을까?
봄과 지난 겨울을 제외하더라도 최근 한여름에는 익산예술의전당에 가보았다. 특히 미술전람만을 보기 위하여서다. 이어서 W갤러리에, 그리고 인갤러리에도 들렀다. 이어 가을로 접어들 무렵 다시 W갤러리에, 또 인갤러리에 들렀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전람회를 자주 열린 셈이다.
가을이라는 정서가 밀려올 즈음, 이번에 솜리골작은미술관에 두 번 방문하였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풍성한 미술관전람회에 많이 둘러보았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미술관전람회에서 얻은 도록과 사진전람회에서 얻어온 도록에 관심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멋있는 그림을 그릴 수 없으며, 사진을 잘 찍을 수 없기에 대리 만족을 충당한 것이다.
숱하게 쌓인 도록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사무실을 옮기면서 일부
돌아보면 미술인들과 사진인들이 아니 미술가와 사진가들이 많이 있다고 보면 통행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돌아보면 그 예상보다 적은 관람객에 지나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내가 좀 부족하더라도 내가 하는 말이 맞고 내가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내로라 하는 타성이 아닌가 하는 우려다.
익산의 예술인들이 좀 더 각성해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
올해 전국 미술대전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사람이 익산에 있다. 공정하며 예술성을 높이 사서 심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본 것이다. 작품을 출품한 사람들은 그 사람의 미술관 즉 예술성을 우선 따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객지에서는 익산 미술가를 알아주는데, 오히려 익산에서는 유명한 미술가를 인정하지 않다니...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의 그림에 대하여 평을 할 수 없는 사람이며, 그 사람의 그림에 좋다고 말할 정도도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림을 보면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그림이 무엇으로 그린 것이냐고, 그림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고 구체적으로 묻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묻고 답하면 그것이 바로 미술에 관한 관심이 될 것이고, 예술가에게는 격려와 응원이리라.
흔한 시골장 즉 전통 시장이라는 곳에 가보면 몰리는 곳이 있지만 사람이 모이지 않는 곳이 있기도 하다. 그러면 상인이 말하기를 ‘도대체 이렇게 한 사람도 안 오냐, 안 사도 좋으니 지나가면서 말이라고 붙이고 그냥 말을 던지고 가는 사람이 있어도 좋겠다.’고 하는 말을 종종 듣기도 한다.
미술이 그렇고 사진도 그럴 것이다. 더구나 문자로 된 책은 더더욱 심각한 상황일 것이다. 나 자신이 바로 문학을 하고 싶다는 사람이며, 전해주고 싶다는 말이 있다며 책을 여럿 발간하기도 하였지만 메아리가 없는 숲이다. 아스팔트로 씽씽 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숲 안에 들어가고 숲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뿐이다.
오늘 본 솜리골작은미술관에서는 여섯 명이나 공동 전시를 한 규모이다. 전국에서 익산을 비롯하여 6개 곳의 작은미술관 소속으로 출품한 것이고, 합동전시회를 한 셈이다. 그러나 협소하여 한두 점만을 선정하여 선을 보인 것이다.
김포 작은미술관의 김희선, 정선 터미널작은미술관의 김형구, 인천 우리미술관의 김수환, 남해 바래기작은미술관의 심은영, 익산 솜리골작은미술관의 강성은, 대전 중동작은미술관의 권영성 작가가 참여하였다.
나는 이런 미술가의 작중 의도를 모른다. 예를 들면 우리가 목도하게 되었을 때 보이는 것들, 스스로의 거울상을 인식하는 작업을 통해 관객에게 자기 회고의 시간을 제공하는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회화의 표현을 통하여 작가의 상상에서 질퍽하게 떨어져 나오는 뒤척거림이 바로 나타나는 작품이라고 한다. 단순한 단 채널을 통해 영상으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가족은 꿈과 희망이라는 환상아래 변해가는 가족의 욕망과 절망을 그렸다. 또 그림자만으로는 원래의 모습을 헤아릴 수 없으며, 바늘이 오고가는 동안 혼자만의 생각과 대화들을 되풀이하며 지극히 여성적인 방법으로 소통을 하고 있는 작품도 있다. 무미건조한 건물을 투영하여 필요에 의해 획일적이고 패턴화된 주거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목적에 맞는 선과 기호, 단순화된 색, 간결한 단어들을 나열하고 응집되어 질서를 유도해내는 작품도 있다.
작가들이 주장하는 설명이지만, 내가 본 그림은 어떻게 설명을 들어야 했던 것인가? 보는 사람과 보여주는 사람의 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상상이 다르다.
기생 세대가 아니라 신참이므로 자유롭고 상상의 날개를 달고 나섰을 것이다. 이해하면 신구대 간의 동의성을 찾아 닮아 세대 차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눈높이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가 큰지 작은지 문제가 아니라, 이념과 신념의 차이를 타파하며 숨겨진 상상을 끄집어낸 예술성에 접목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래를 찾아나서는 발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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