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다리의 중간에 걸터앉아 / 한호철
내가 태어난 곳 황등은 인구 1만 2천여 명의 작은 면이다. 면적은 약 2,778만 평방미터로 842만 평에 달한다. 태어나고 청소년기까지 지낸 이곳을 고향이라고 부르며 빼어나지는 못해도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야트막한 산이 있어 황등산이라 불렀고, 초입에 있는 산은 청금산이라 불렀다.
해발 40m 인 이 산에도 청금산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해발 60m인 산에는 정식 이름이 없다. 그래도 면 소재지를 굽어보며 5일 장과 영화관 그리고 모든 기관을 품고 있었으니 황등산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리라. 이 황등산 봉우리에는 방위와 측량의 시초가 되는 기준점이 있었다. 익산 시내 쪽으로는 들판을 건너서 해발 20m 정도의 낮은 도치산이 있다. 황등의 주변에서는 이 정도가 가장 높은 산이다.
내가 사는 익산시내에서 고향을 가려면 도치산과 반듯반듯 정돈된 들판을 건너야 한다. 전에도 잘 닦여진 비포장 신작로가 있었지만 지금은 4차선으로 포장되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국도 23호선을 타고 가다가 익산시내를 벗어나 북쪽으로 처음 만나는 고장이다.
이러한 농지를 가지고 있으니 주업은 농업이고 쌀 외에도 참깨, 생강, 고구마 등이 많이 재배되는 곳이기도 하다. 초가을부터 황등역에 모여진 고구마는 늦가을까지 그렇게 모여들어 산더미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고구마 부대들은 땅바닥에 바로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 받침대를 만들어 놓고 쌓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커다란 돌멩이 위에다 올려다 놓았다. 그리고 겨우내 주정공장으로 운송되었다.
이렇듯 역 주변 전체를 덮을 만큼 고구마도 많고 또 그것들을 받쳐 줄 돌들도 많았었다. 이 돌은 예의 황등산과 청금산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화강암이다. 이것은 중생대 쥐라기 시대에 생성된 것으로 대보화강암이라 하는데 그 품질이 전국제일이다. 100년 동안 채취해올 정도로 매장량이 많지만, 단단하기도 하여 정을 맞아도 쉽게 부서지지 않으며, 철분함량이 적어 돌의 색이 붉지 않다. 어떻게 보면 푸른색마저 띠고 있다.
이런 돌이니 석공들이 일하기 불편하여 꺼리기는 하지만 일단 시공하고 보면 오랫동안 보존되고 사랑받는 돌이다. 인근의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이나 국보 제289 호 왕궁리 5층 석탑도 이 돌로 만들었으니 그 가치는 불문가지이다. 국회의사당이나 독립기념관 등 필요한 곳에는 어김없이 사용되고 있을 정도의 귀중한 자원이다.
그러니 나도 내 고향 황등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황등으로 가는 입구 길은 폭 1.5 km의 들판을 건너야 한다. 그리고 그 들판의 가운데로 탑천이 흐른다. 그리고 황등 쪽과 시내 쪽으로 각각 작은 농수로가 흐른다. 이 모양은 내천 자를 연상시키는 형상이다. 그런 내천 자를 가로질러 도로가 곧게 뻗어 있다. 그 중 가운데에 있는 것이 탑천이고 면의 경계이므로 다리를 건너면 황등이다.
어릴 적에는 이 길을 가다가 다 왔다는 안도감에 앉아 쉬기도 하였다. 때로는 뛰어 들어 수영도 하였다. 그리고 낚시도 하였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어른들은 이 천을 막고 물을 품어 물고기도 잡았었다.
옛 생각이 나서 다시 조용히 앉아 본다. 지금도 낚시하는 사람들은 있으나 이곳에서 잡은 물고기는 먹지 못한다고 한다.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저 물에서 수영했다는 걸 믿고 싶지 않다. 그 당시 수영을 잘 못하여 물을 많이 먹었을 텐데 아직까지 배에 이상이 없는 것이 대견하기만 하다. 수 문 위로 올라가 나사를 돌려 물을 조절하던 생각도 난다. 뭐가 그리 신기하고 뭐가 그리 궁금하여 만져보았을까.
서쪽에서 바라보는 황등산은 주봉이 없어진 흉한 상태다. 제 2봉이던 곳이 이제는 주봉이 되었고, 그 높이 또한 낮아졌다. 자칫하면 아파트 높이 만도 못한 산이 될 지경이다.
한 달에도 한 두 번씩 가보는 고향이지만 옛 모습을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수영한다고 실컷 먹었던 물인데 이제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는 먹지도 못한다니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황등의 기준이 되라고 기준점을 두었었는데, 이제는 어디에서 기준을 찾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혹시나 고향사람들이 기준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 어쩌나 걱정도 된다. 그 만큼 달라진 고향을 되돌아본다.
내가 서있는 다리가 요교다. 청금산과 도치산 사이에 놓여진 평야가 마치 잘록한 허리와 같아서 요교라 부른다. 또 동에서 서로 흐르는 탑천의 허리를 싹둑 잘라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요교다. 그러니 우리말로는 허리다리이다.
이 도로가 허리와 같은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합천이 평야에 주는 기능이 허리역할과 같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다리가 허리와 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확실하다. 이 길이 바로 대동맥이기 때문에 말이다.
탑천의 물은 예나 지금이나 아무 말 없이 흐르건만 허리다리에 앉아 지켜보는 사람은 변했다. 옛 물을 고마워하면서 바라보았었지만, 지금 물에는 침이나 뱉고 일어나 돌아서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래도 허리다리 밑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물이 있다. 평야를 적시면서 여름내 나락을 살찌우고 버려진 물들을 모아 만경강으로 보낸다. 비록 남이 쓰다버린 찌꺼기일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세상 모두를 수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