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바쁜 세상

꿈꾸는 세상살이 2006. 6. 3. 15:34
 

바쁜 세상 /한 호철


  나는 어릴 적에 소위 말하면 전기 닳을까봐 걱정하는 그런 시골에서 자랐다.  그래서 저녁에는 가능하면 빨리 자야 했고, 그 규칙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공부하는 중이라는 답이었다.

대리 만족성 한을 세긴 부모의 심정에서, 자식이 공부 좀 하겠다는데 그깟 불 좀 닳으면 어떤 대수랴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불을 아껴야 되는 저녁은 일찍 자고, 불 안 드는 새벽은 언제나 농부들의 몫이었나 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도 역시 닮았는지 새벽에 비교적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면 단위에서 시내로 통학을 해야 했던 터라, 아무리 새벽에 일찍 일어나도 열차를 타고 학교 가는 시간은 일정했다.  그래도 일찍 일어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맑은 공기 마신다고 마당에 나가도 보고,  맨손체조도 해보다가, 통금이 풀린 새벽에 일찍 산에 올라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가까운 옆 마을의 친구와는 누가 먼저 새벽 산을 오르는지 경쟁을 하게까지 되었다.  이기고 싶은 욕심에 기상시간이 점점 빨라졌지만 산에 올라가는 시간은 한계가 있었다.  이른바 통행금지로 정해진 시간 때문이었다.  때로는 일찍 일어나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통행금지가 풀리면 바로 산으로 올라가기까지 했다.  사실 아무리 법으로 정해놓은 통행금지이지만, 어린 학생이 새벽에 맑은 공기 마시고 난 후, 정신을 가다듬어 공부 좀 하겠다는데 법이 가로막지는 않았겠지만, 어린 생각으로는 그 규정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줄만 알았다.

한참을 그러다 보니 본질이 왜곡되어 공부의 개념보다는, 누가 먼저 일어나서 하루를 일찍 맞았느냐는 이상한 경쟁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후의 수단이요, 최상의 방법인 밤 11시 59분에 산에 올랐다가, 하루가 시작되는 시각이 되면 그때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까지도 행해보았다.  지금 생각해도 이 방법은 참으로 확실했던 것 같다. 

그런데 현재는 어떤가. 언제 어디서나 내가 깨어 있는 동안에 주위를 살펴보면 항상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내가 첫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해도 그 버스를 운전하고 나온 운전기사가 있고, 아무리 늦은 막차를 타도 그 차를 차고지에 놓고 돌아가는 기사가 있다.  눈보라쳐도 거리를 활보하는 미화원이 있고,  새벽에 눈을 비비고 경매시장에 물건을 사러가도 벌써 경매 진행자가 활동하고 있다.  비바람 몰아쳐도 마지막 보내는 길이라 참으며 화장장에 갔더니, 그곳에서는 그 일을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 있다.  새벽에 신문이 도착하자마자 읽으려해도, 그 신문을 보급하는 어린아이조차 나보다 더 일찍부터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이처럼 언제나 내가 가장 어렵고 힘들며 고통을 참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고, 나는 언제나  남을 위하여 하기 싫고 귀찮은 일을 벅차게 행하는 숭고한 자라고 생각할 때도 많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역경을 견뎌내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나 무수히 존재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고 다짐할 필요가 있다. 내가 하는 일에 있어 더 열심히 해야 되겠구나. 내가 남에게 어떤 것을 베풀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남에게 어떤 삶의 지표가 될만한가.  아무리 깜깜한 밤에 혼자서 행하더라도 누군가가 다 알아주는데 굳이 들어내 나타낼 필요가 있는가.  세상이 나 혼자  나의 가족만의 힘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곳이다.

어차피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하니까 남에게 베푸는 삶이면 좋겠고,  아니면 최소한 피해를 주지 말아야겠다.  나보다 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나라 내나라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 틀림없다.   2002.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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