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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은 국태민안(國泰民安)에 불교를 택하였다.

꿈꾸는 세상살이 2009. 7. 1. 20:24

무왕은 국태민안(國泰民安)에 불교를 택하였다.


백제 무왕(武王)은 서기 600년 약관의 나이인 스무 살에 왕위에 오른다. 당시 상황을 보면 554년 상왕인 26대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사망하고, 선왕인 27대 위덕왕은 끊임없는 외세와의 전투로 국력이 낭비되었다. 거기다가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점차 왕권이 약해져가고 있었다. 그러한 증거는 위덕왕의 선왕인 성왕의 무덤이 유력 관료의 무덤과 비교하여 허술함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제28대 혜왕과 29대 법왕이 각기 재임2년 만에 죽음으로 왕권을 내준 것은 간과할 일이 아니다.


이런 때에 제30대 무왕은 흐트러진 민심을 통합하고 국력을 집중하는 방편으로 호국불교를 추진하였다. 물론 당시에는 민속신앙에서 불교로의 전이가 이루어지던 때인 만큼, 동양의 모든 국가들이 불교를 구심점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던 때였었다. 

실제로 639년 무왕 때에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익산으로 천도를 하여 귀족들의 세력을 잠재우려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미륵사가 창건되기 전에도 백제 전역에는 사찰의 건립이 줄을 잇고 있었다.


무왕 4년 603년에 혜공대사가 세운 장수의 팔성사, 무왕 5년 604년에 서암대사(瑞巖大師)가 세운 완주의 위봉사, 무왕 7년 606년에 혜공대사가 세운 군산의 상주사, 무왕 14년 613년에 원광스님과 원공스님이 세운 군산의 은적사, 무왕 25년 624년에 혜덕선사가 세운 김제의 문수사, 무왕 33년 632년에 여환대사(如幻大師)가 세운 장성의 백양사, 무왕 34년 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스님이 세운 부안의 내소사, 무왕 37년 636년에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세운 정읍의 내장사, 그리고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으나 혜명스님(579~631)이 세웠다는 완주의 학림사도 무왕 대에 세워진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미륵사는 무왕 40년 639년에 왕비의 발원에 의해 만들어진 사찰이다. 당시 동양에서 가장 큰 절이었으며, 3탑 3가람의 병립식 배치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는 종교계에서 불법을 설파하고 중생의 포교에 목적을 두고 만든 사찰이 아니라, 국가에서 왕실의 안위와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목적에서 출발한 사찰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국민의 화합과 단결을 모도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꾀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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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09.06.27 미륵사지출토 진신사리친견법회의 장면들 

 

 

미륵사지에는 동원에 석동탑,서원에 석서탑,중원에 목중앙탑이 있었다. 그중 아래 베이지색 가건물의 내부에는 서원의 석탑이 반쯤 무너진 채로 있었다. 이것을 국보 제11호로 지정하여 미륵사지석탑이라고 하였다. 동원의 석동탑은 무너져서 완전 파손되었기에 빨리 복원할 수 있었다. 

 

중앙의 그림은 탱화인데, 족자처럼 보관하였다가 필요에 따라 걸수 있다고 하여 괘불탱화라 한다.

사리친견법회는 일반신도들이 사리를 직접 볼 수 있도록하는 의식용 법회를 말한다.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는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것처럼 하고 미리 49재를 지내는 의식. 이는 죽어서 죄를 씻고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하여 49재를 지내는 것을, 살아서 미리하여 죽으면 바로 왕생극락하자는 의미다. ?

 

 

 

 

동원의 석탑과 동원의 당간지주(당간지주도 동원과 서원에 각각 하나씩 있다)

 

 

 

 

서원의 석탑 즉 미륵사지석탑은 저 가건물 속에서 완전 해체되어 1층 심주석 가운데에 사리공이 있었고, 그 안에 사리호(3중으로 된 사리병)가 있었는데, 부처님 진신사리는 그 사리호 내호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 놓여진 의자는 모두 2,500개였는데, 사람이 꽉 들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