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비각을 가진 유계신도비 및 남원윤씨절행각
유계신도비및남원윤씨절행정판(兪溪神道碑및南原尹氏節行旌板)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와초리 산 96-1번지에 비석이 하나 있으니 바로 유계신도비이다. 이 신도비는 기계유씨종중의 소유로 바로 옆에 있는 남원윤씨절행정판과 함께 1990년 6월 30일 문화재자료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성당면 와초리의 상와마을 작은 야산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시남(市南) 유계(兪啓 1607~1664)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현종 9년 1668년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지었으며, 사후 94년째인 영조 33년 1757년에 건립되었다. 유계는 부여군 임천면의 칠산서원, 무안군 무안읍의 송림서원, 함경북도 종성군 용계면의 종성서원 등에 제향되어 있다.
유계의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유양증(兪養曾)이며 참봉을 지냈고, 어머니는 의령 남씨(南氏)로 병조참판을 지낸 남이신(南以信)의 딸이다. 조부 유대경(兪大敬))은 정언, 지평, 수안군수를 지냈다. 유계는 일찍이 김장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여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민의 5현으로 일컬어졌다.
1633년 인조 11년에 식년문과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리로 임명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다가 오히려 척화죄로 몰려 임천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3년 후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 서실을 짓고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이때 ‘가례집해(家禮集解)’를 개작하여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지었다. 가례원류는 유계가 글을 썼으나 사후 80년이 지난 숙종39년 1713년에 이이명(李頥命)이 왕에게 품신하여 윤허를 받고 유계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간행한 특이한 서책이다.
1644년 주서로 기용되어 1646년 무안현감이 되었고, 1649년 인조가 서거하자 홍문관 부교리로 왕의 장례절차를 상소하여 예론에 따라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인조의 묘호(廟號)를 정할 때 조(祖)자 대신 종(宗)자를 주장하였으나, 이듬해에 선왕을 욕되게 하였다는 죄로 온성과 영월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귀양에서 풀려났고 송시열과 송준길 등의 추천으로 시강원의 문학으로 1652년 다시 등용되었으며, 효종 때는 고관(高官)을 역임하였다.
효종이 서거하여 복상문제가 일자 자신이 속한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며 윤휴 등의 3년 설을 논박하여 유배를 보내거나 좌천시켰다. 현종 3년 1662년에 대사헌, 이조참판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유계는 임천의 칠산서원(七山書院), 무안의 송림서원(松林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율곡과 김장생(金長生)의 학통을 잇는 한편, 예론에서는 송시열 중심의 노론 전위대 역할을 담당한 학자이면서 문신이요 정치가였다. 저서로는 ‘시남집(市南集)’, ‘가례원류(家禮源流)’, ‘여사제강(麗史提綱)’, ‘강거문답(江居問答)’ 등이 있다.
가례원류는 주자의 ‘가례(家禮)’를 기본으로 하여 의례(儀禮), 주례(周禮), 대례(戴禮) 등 여러 경전의 내용을 들고 주(註)를 붙인 것이다. 이것을 ‘원(源)’이라 하였으며, 후대의 유학자들의 예설을 조사하여 ‘유(流)’라 하여 예설을 밝힌 ‘가례원류’를 이룬다. 이는 김장생의 예설에 토대를 둔 것으로, 뒷날 윤선거와 공편하였는지를 두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강거문답(江居問答)은 율곡 이이의 동호문답(東湖問答)을 본받아 고금의 치도(治道)를 논하고 자신의 정치사상을 피력한 내용이다. 여기서 이이의 학설을 요약하여 ‘정치의 근본은 수기(修己)이고, 정치의 핵심은 임관(任官)이며, 정치의 급무는 구민(救民)이다.’며 그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은 고려시대 노론정권하의 역사관을 대변하여주는 것으로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본받아 지은 강목체(綱目體) 책이다.
유계신도비는 방형의 대좌에 개석(蓋石)을 갖추고 있는데, 1995년 비각과 담장을 설치하고 주변을 정리하였다. 좌대의 높이는 39cm, 두께 120cm, 폭 166cm이며, 비신은 높이 231.5cm, 두께 45cm, 폭 85cm이다. 또한 개석은 높이 50cm, 두께 90cm, 폭 120cm가 된다.
이 신도비는 마을의 가장 뒤쪽으로 돌아가면 바로 산 아래에 있다. 원래는 현재의 위치에서 보면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고, 비각을 세우면서 넓은 마당도 설치하여 위엄있는 모습으로 옮겨 놓았다. 원래 놓였던 자리에는 원위치를 알리는 작은 표지석이 있다.
이 표지석으로 미루어보면 신도비를 옮긴 사람들은 모든 일처리에 사리가 분명한 사람들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원위치대에는 유계의 시가 적혀있어 밋밋함을 덜어주는데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을밤
가을하늘 텅비우고 가을밤 쌀쌀한데
달빛에 물이들은 구름마저 조촐하구나
이대로 바람높아 찬 이슬맺게 되면
곱게 핀 연꽃송이 시들을까 저어하네.
비각과 나란히 절행각(節行閣)이 있다. 이 절행각은 남원윤씨의 행적을 기리는 ‘남원윤씨절행정판’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여기서 말하는 남원윤씨는 유계의 맏며느리이다. 주변에 상와마을 경로당이 있으며, 그 중간에 일가(一家)의 묘소가 있고 제각도 있다.
절행정판의 크기는 가로209cm, 세로 49cm, 두께3cm 이다. 절행각은 목조건물로 맞배지붕을 하여 기와를 얹었으며, 1686년에 정려된 내용으로 기록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절부숙인은 중훈대부 행 이조정랑 유명윤(兪命胤)의 처이며 남원윤씨의 가문에 정려문(旌閭門)을 세우도록 기유(己酉)년 사월 0일에 명하였다. 숙인윤씨는 목사 형성의 딸로 일찍이 이조정랑(吏曹正郞) 유명윤에게 시집와서 시남(市南) 유계 선생의 맏며느리가 되어 공경을 다하고 예절을 극진히 다하였다.
새벽닭이 울면 침소에 나아가 문안을 드리고 종일토록 안방에서 쉬지 않고 시부모님의 음식과 약물을 지극정성으로 손수 받들어서 효를 다하였다. 손가락과 발이 헤어져 상함에도 조금도 이를 그만두지 않았고 병을 간호할 때에는 밤새도록 창밖에 서서 근처를 떠나지 않으니 온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더불어 부인은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보다 뛰어나 옛 서적에 두루 통달하고 출가 전에 행실이 훌륭하니 목사 공이 심히 애증하였다. 유명윤이 불행하게도 일찍이 세상을 떠났는데 병이 위급하자 두 손가락을 잘라서 많은 피를 드렸으나 마침내 상을 당하니 몹시 서러워하여 몸을 해침(損傷)이 예절에도 지나쳤다.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죽만 먹고 홑옷 한 가지만 입었고 또 고기를 먹지 않은 지가 삼년이다.
늙어서 기력이 쇠해도 비단 옷이나 고기를 몸과 입에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거처는 항상 풀거적위에서 앉고 눕고 하였다. 무릇 이와 같은 일은 옛 서적에 기록되어 전하는 정부인(貞夫人)도 이에 미치지 못할 일이다.
현종 때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경연석에서 부인의 절행(節行)을 아뢰자 임금께서 특별히 정려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아! 우리나라 역대임금들의 후비들이 감화되어 이를 취하니 부인이 행한 행실의 아름다움은 유씨가문의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효험이 있음은 숨길 수 없는 것이로다. 이것은 풍속을 교화시키는데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이요, 임금이 풍속을 장려하고 백성을 일으키는 뜻을 천하에 알리지 않을 수 없으므로 대략 이와 같이 기록하노라. 숭정 병인년 정월(숙종12년, 1686년 1월) 은진 사람 송시열 지음.
2010.07.07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