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나의 주변 이야기

엄동설한의 재산포기각서

꿈꾸는 세상살이 2009. 1. 26. 20:29

엄동설한의 재산포기각서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이 놀러 오라고 하도 성화를 대기에 일정을 잡아 방문하였다. 거리래야 기껏 30km이니 그냥 친구를 방문하는 것도 좋지만 겸사겸사하여 인근의 문학기행을 하기로 하였다. 아침 8시 집을 나서서 매일 들르던 곳을 방문한 후 방향을 틀었다. 이날도 많은 눈이 왔다. 서해안 지방에 눈이 많이 내리니 주의하라는 일기예보가 있은 뒤였기에 내심 긴장은 되었다. 내리는 눈이야 맞으면 되지만 날씨가 추우면 문학기행으로 찾아가는 목적지에서 곤란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우려했던대로 바람마저 도와주지 않는 날씨가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다 사나이가 되었다. 해양대학에 갔고 후에도 일정기간 배를 탔었다. 배를 타면서 별로 돈쓸 일이 없었던 그는 모은 돈을 고스란히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보냈다. 그 돈은 부모님이 생활비로 사용할 것을 염려하지는 않았는데, 당시 부모님은 전답도 많고 생활이 넉넉하여 부러움이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였으나 당분간 외항선을 더 타게 되었다. 예전과 달리 결혼 후에는 자신의 급여를 모두 아내에게 보냈으나, 아내는 모두 부모님께 드리고 결과적으로 생활비를 타서 쓰는 셈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한 집에 살던 부모님이 아직도 생활 경제권을 가지고 계셔서 쥐락펴락 하셨던 때문이었다. 남편이 밖에 나가고 없는 새댁이니 다른 도리도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의무 기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불화가 일어났다. 최소한 결혼 후에 벌어서 보냈던 재산을 돌려달라는 아들과, 한 집에 살고 있었는데 무슨 재산을 달라는 것이냐는 식구들 간에 이견이 일었다.


그 친구는 재산포기 각서를 썼다. 자기가 벌어서 집으로 보냈던 재산과 부모님이 물려주실 예상 재산에 대한 포기각서였다.

부모님도 재산이 많아서 자식이 외항선을 타면서 번 돈을 사용해야만 하는 처지가 아닌데도 못 내주겠다는 것은 자식의 마음에 멍들게 하는 일이었다. 거기에는 부모님 외에 다른 식구들의 의중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혹시 부모님이 가진 재산을 물려주신다면 누군가와 나누어야 하니 자기 몫이 줄어들 것이 뻔하여, 아들이 번 돈까지도 부모님의 재산으로 계산하여 분배하고 싶어하는 어느 누구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라 판단되었다. 그는 평소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환심을 사두었던 것이 확실하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쓰고 남을 만큼의 재산이 있었는데도 그만 달콤한 사탕발림에 넘어가고 말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결국은 자신이 모았던 재산은 물론이고 유산으로 물려받을 몫마저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고 말았다. 그것은 현실 싸움에서 지고 쫒겨 가는 패잔병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때가 벌써 25여 년 전인데 그날도 오늘처럼 추웠단다. 소위 말하자면 남들이 말하는 이불보따리 하나와 솥단지 하나를 들고 흥부네처럼 분가를 하였던 것이다. 갈 곳이 없는 그들은 달동네 가장 높은 집에 가서 생활을 시작하였고, 아는 사람들과도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여 카센타를 열었다.


억지로 버티면 얼마간의 재산을 받아 낼 수도 있었겠지만, 젊은 혈기에 그 재산이 없어도 살 수 있는데, 그렇게 대하는 사람들과는 더 이상 마주하기 싫다는 생각 하나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젊은 혈기 하나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냉혹하였다. 그가 라면을 먹을 때 부모 형제들은 불고기 파티를 하였었고, 그가 냉방에서 감기와 친구하고 있을 때 부모 형제들은 난방이 잘된 거실에 앉아 창밖을 감상하고 있었다.


어느새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간 숱한 고생을 밥 먹듯 해왔던 수고 덕분에 이제는 한시름 놓을 정도는 되었다. 하긴 나이가 50을 넘은지도 벌써 오래되었으니 나름 안정을 찾을 만도 하였다.

오늘처럼 눈이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면 그때 생각으로 앞이 흐려진다고 했었다. 그런데 당시 그 많던 전답은 택지개발지역으로 지정되어 보상을 받았다. 전에 농사만 지어도 부자라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하였던 그 토지들은 이제 돈방석으로 변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돈방석으로는 모자라서 돈카페트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자식이 번 돈이라 하여도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으니 부모님께 드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던 사람은 지금도 잘 살고 있다. 나이가 좀 들긴 하였어도 그 당시에 약국을 하면서 돈도 잘 벌었으니 지금이라 하여도 문제 될 것이 무엇이겠는가. 거기다가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을 터인데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얼마전 그 친구는 고향을 방문하였었단다. 새로 문을 연 노인 전문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고 왔다고 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부모님만 위하는 척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어머니는 요양원에 계신 것이었다. 모시는데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모시기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가 싫어서 보낸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단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도 모셔야 할 부모님이건만 그렇게 많은 재산을 받았으면 그냥 그런 것쯤은 고맙다고 다반사로 했어야 할 일이었다.


세상은 욕심을 부리며 갖기를 원하는 사람은 더 갖고, 상대방을 생각하며 양보하고 겸손한 사람은 뒤처지는 모순을 가지고 있나보다. 그렇다고 욕심 부린 사람들에게 길가다가 날벼락 맞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자신들이 알아서 사회에 환원 좀 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둘러본 채만식기념관과 문학비에서 탁류가 생각났다. 그것은 마구 거칠게 흘러 탁해진 물이다. 또는 애초부터 홍수가 나서 뒤엉키고 뒤집힌 흙탕물로 흐려진 물이었다. 없는 자는 하는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나, 가진 자는 모든 일에 편법과 불법을 써 가면서도 쟁취하는 그런 것들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이것이 세상의 음과 양인가 한다. 어느 것이 옳은지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분간하기도 어렵게 뒤엉킨 채로 그렇게 섞여있는 세상이다. 대통령으로부터 국회의원 시장 군수, 그리고 시군의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거직에서 흑색선전과 상호비방, 거짓말이 난무해도 선량한 시민과 양보하고 겸손한 국민이 있어 이나마 버티는 우리나라가 다행일 뿐이다.

 

 군산시월명공원에 있는 채만식문학비

 

집에서 내다본 눈오는 날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