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가을산과 함께하는 문학기행
수신 : 회원제위
번호 : 2006-07
제목 : 2006 가을 운영위원회 모임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루하던 시간들도 지나가고 이제 바빠지는 계절이 왔습니다.
한 해 동안의 지난 일들을 돌아보면서 부족한 것에 대하여 점검을 하고 풍성한 결과를 맺도록
마무리하는 단계입니다.
이번 우리 모임은 ‘한국문예연구문학회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아래와 같이 모시고자 합니다.
여러 일상으로부터 바쁘시겠지만 모두 모여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 시 : 2006. 11. 12. 일요일 10:00 모이기
장 소 : 호남고속도로에서 백양사 나들목으로 나와서 만나기.
서해안고속도로 이용시는 10:15 방장산 휴양림입구에서 만나기.
국도이용시는 10:15 방장산 휴양림 입구에서 만나기.
준 비 물 : 각자 필요한 모든 물품 (중식, 간식, 물, 수건, 약품, 기타 ...)
회 비 : 없음
이동방법 : 개인 차량으로
참가대상 : 한국문예연구문학회 회원 및 비회원도 가능
목 적 지 : 방장산 휴양림 모임 후 홍길동 생가 문학기행으로
백양사 나들목에서 -> 방장산 휴양림으로 이동 -> 금곡영화마을길
-> 편백나무 삼림욕장길 -> 홍길동생가 ->종료.
방장산 휴양림 소개 : 전남 장성군 북이면 죽청리 산 70-1 외 8필지
전남 장성과 전북 고창, 정읍 경계에 솟은 방장산(734m)은 내장산 서쪽 줄기를 따라
뻗친 능선 중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이다.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으로 추앙받아
왔으며 주위의 내장산, 백암산, 선운산 등의 명산을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도 결코 기세가
눌리지 않은 당당함을 보이고 있다. 지리산을 달리 방장산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신이 살 듯한
신비로운 산에만 붙이는 이 이름은 청나라에 멸망한 명나라를 숭상하던 조선조의 선비들이
중국의 삼신산 중의 하나인 방장산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함.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방등산이라고 불리웠으며 백제가요인 방등산가는 바로 이 산을
무대로 해서 지어진 노래이다. - 먼 옛날 방등산에 숨어든 도둑의 무리들이 한 여인을
납치해갔다. 남편이 구해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남편이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울다가 지쳐서 부른 노래가 방등산가라는 것.
한편 방장산 중턱에는 방장산 자연휴양림이 위치하고 있다.
휴양림 내에는 참나무류와 소나무, 편백, 낙엽송, 리기다 소나무 등이 많이 자라고 있으며,
주능선에 오르면 서해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이할 수 있는데
이 덕분에 패러글라이딩 동호인들이 종종 이곳을 찾기도 한다.
하얀 색으로 외벽을 단장한 산림문화 휴양관에는 7평형과 16평형 각 2개,
9평형과 11평형 각4개 등 모두 12개의 객실이 구비돼있다.
휴양관과 갈재로 이어지는 임도가 시작되는 삼거리 지점에는 4개의 콘도식 통나무집이
들어서있다. 10평형이 3개, 20평형이 1개이다. 그 밖의 시설로는 숲 탐방로, 체력단련장,
캠프파이어장, 물놀이장, 야영데크 등이 들어서있다.
구역면적 : 674 ha 개장연도 : 2000년 6월 30일
수용인원 : 최대 500명/일, 최적 300명/일 휴양림 관리사무소 (061-394-5523)
도로안내 : (호남고속도로 이용)
호남고속도로 백양사IC, 정면에 LG주유소, T자형 3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고창,
석정온천 방향으로 894번 지방도를 따라 6km 지점 휴양림 안내판, 우회전하여
60m정도 가면 휴양림 안내소가 나타나며, 백양사IC에서 약 10분정도.
(서해안고속도로 이용)
서해안고속도로 고창IC, 고창읍 석정온천, 백양사 방향으로 11km 지점,
왼쪽 휴양림안내판, 좌회전하여 60m가면 휴양림 안내소, 고창IC에서 약 15분정도.
홍길동 생가터 :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424번지
홍길동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민중영웅으로 실존인물이며 허구적 소설의 주인공이다.
역사에서는 반역자, 또는 강도로 기록되어 있으나, 소설에서는 봉건제도에 맞서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활빈당을 이끌고, 이상국인 일본 오끼나와의 율도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역사상 홍길동은 조선초 15세기 중엽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첩의 자식을 제한하는
국법 때문에 출가하여 차별받던 소외된 민중을 규합, 활빈당을 결성한 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봉건적 관군에 체포, 남해로 유배 되었으나 탈출하여
무리를 이끌고 오끼나와로 진출하였다. 그곳에서도 민중을 대변하는 민권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동안 홍길동의 역사적 실체가 왜곡되어 왔으나, 끈질긴 노력 끝에 그 베일에 쌓인
비밀이 밝혀졌다.
뱃길로 3000리나 떨어진 일본 최남단 오끼나와에서 후반부 삶을 살았던 그곳에는 민권운동의
선구자 홍길동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서있다. 이러한 홍길동의 생애 전반에 걸친 학술연구의
성과가 총체적으로 정리되었으며 500여 년 전의 일본과 한국간의 교류사를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에 주변 5,700여 평의 부지를 매입, 생가를 복원하였고 2004년 5월 3일 개관하였다.
건 물 : 211.37㎡
안채 (한식기와) 40평, 아래채 (초가) 5평,
사랑채 9평, 문간채 10평
전통한식 목구조로 조선시대 생활상 100 여점 전시
문화센터 관리사업소 (061) 390-7527, 394-7240
위와 같은 내용을 가지고 2006년도 운영위원회를 개최코자 하오니,
회원여러분은 모두 참석하시여 우리 문학회의 발전을 도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06. 10. 24
한국문예연구문학회 0 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