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보아서 좋은 것/익산 00 교회 이야기

크리스마스와 그러지마소

꿈꾸는 세상살이 2007. 12. 28. 20:06
 

크리스마스와 그러지마소

 

지난 25일은 성탄절이었다. 풀어보면 성스러운 탄생일을 즐거운 명절로 맞는 날이다. 서기 1년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아기 예수가 오셨고, 당시의 종교 관계자들은 새로운 지도자가 탄생하셨다고 축복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2000년도 훨씬 전부터 이어진 일이지만 서양의 풍습이 동양에까지 미친 일중의 하나다.

 

예전만은 못하지만 거리에는 축하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뭔가를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교회마다 구주로 오신 아기예수를 맞기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성탄절이 되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다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를 가리지 않고 죄사함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는 정도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왔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교인들은 아기 예수를 맞을 준비에 들떠 있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각자는 모든 일들을 마감하며 못다 이룬 것을 정리하는 것도 성탄절의 의미가 있었다. 어쩐 일인지 갈수록 경기가 시원찮더니 올해는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교회에서는 이웃돕기로 1천만 원을 내놓았다고 하였다. 교회의 규모나 신자수로 보면 그리 많지 않은 액수이나, 올해와 내년 우리의 형편으로는 과감한 금액이었다. 연간 40억 원씩 총 8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한 형편이다.

목사님은 광고시간에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어느 대학과 인근 교회에 각각 500만원씩 보내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좀더 내핍 생활을 하자고 다짐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해마다 만들던 교회 달력도 만들지 않았고, 성탄절에 주던 기념선물도 없앴다고 하였다. 듣고 보니 참 잘한 일같이 들린다. 달력이야 다른 데 것을 사용하면 되고, 선물은 안 받아도 믿음만 있으면 그만 아닌가 생각되었다.

무슨 일을 함에 있어 지도자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때가 많다. 모든 사람의 의견을 수렴할 수도 없는 것이며, 어느 한 편이 좋으면 어느 한 편은 서운한 것이 세상 이치니 말이다. 이번에도 그런 결단이 잘된 결정을 한 것처럼 여겨진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성탄절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는데 출구가 복잡하다. 그냥 줄을 서서 죽죽 나가면 그만인데 왜 이리 더딘지 모르겠다. 자세히 보니 누가 앞을 가로 막는 것도 아닌데 발걸음이 엉거주춤이다. 뭐가 그리 서운한지 미적거리다 보니 하염없이 늘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발걸음을 애써 움직이면서 내뱉는 말들이 들린다. 엊그제 맞은 나의 생일에는 미역국도 끓이고 떡이라도 해 먹었는데 성탄절에 뭐가 없으니 서운하다는 것이었다. 어른의 생일이 아닌 아기예수의 생일이라서 그런지 약간 부족한 느낌도 든다고 하였다.

듣고 보니 그도 그럴 듯한 말이었다. 어릴 적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까지도 모두 불러 놓고 떡이며 과자와 빵을 먹던 성탄절이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같이 축하해주고 반기는 크리스마스였다.

 

그러나 오늘은 어떠한가. 만왕의 왕이라는 예수님이 오신 날에 성대하지는 않지만 조촐하면서도 자축하는 의미는 가지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가 생각되었다. 세상에 살면서 나를 돕는 것보다 남을 돕는 것이 바로 봉사요 희생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내부의 어려움을 어루만져주는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자기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보니 생활이 어렵다고 빚을 탕감해 달라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돕는 것보다, 남을 위하여 봉사와 희생을 하느라 자기 몸을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다.

 

그 사람은 이제는 거동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다음 성탄절을 즐겁게 맞을지 어떨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여기서 고락을 같이 한 내가,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아기 예수의 생일에 미역국을 먹어보고 죽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고 하였다. 미역국 한 그릇을 먹고 죽으나 못 먹고 죽으나 별반 달라질게 없지만, 떡 한 조각이든 빵 부스러기 하나든 생일을 축하한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를 대속하시고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 분의 성일에 그만한 축하는 필요한 일이었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회로서, 병들고 힘없는 노인들과 같이하는 교회로서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도 교회의 임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는 멀리서 고통 받고 있는 자뿐만 아니라, 가까이서 소외당하는 계층도 어루만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에는 그러지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