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이배원 가옥(李培源 家屋)

꿈꾸는 세상살이 2009. 6. 12. 09:22

이배원 가옥(李培源 家屋)

 

구분 : 익산시 향토유적 제10호 (2002.12.14)

위치 :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11-2

규모 : 한식 목조 기와지붕, 안채, 사랑채.

 

이 집은 1917년 이배원(李培源, 1881~1949)이 지은 집이다. 지금의 대문 좌측에 있는 창고 자리는 집안의 부(富)를 일으킨 이배원의 부친이 생활하던 초가(草家)가 있었으며, 안채 뒤쪽으로는 앞마당보다 훨씬 넓은 뒷마당이 형성되어 있다. 뒷마당은 앞마당보다도 높아 아늑한 맛을 주고 있다.

 

현재 채전(菜田)으로 활용중인 곳에는 창고와 헛간, 축사 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집을 지을 때 목수들이 이곳 마당에서 직접 목재를 다듬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울안에 충분한 공간(空間)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이배원의 선친(先親)인 이석순(李錫淳)이 1901년과 1902년에 많은 자산을 풀어 빈곤한 자들을 도와준 것을 고맙게 여겨 향리(鄕里)에 적선비(積善卑)가 세워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가옥의 현재 관리인은 이배원의 손자인 이서영이다.

 

이서영씨는 서울에서 퇴임 후 고향에 내려와서 살고 있는데, 예전의 별채에서 생활한다. 현재도 완전한 주택으로 활용하다보니 수리할 곳이 많은데 문화재로 등록된 후로는 엄청난 수리비를 감당하기도 벅차고, 그렇다고 수리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고 한다. 동생은 처음부터 고향을 지키고 있었음으로 안채에서 살았는데, 건물이 낡고 불편하여 헐고 새로운 집을 지었다. 이때 현대식 슬래브옥상으로 짓다보니 주변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후회(後悔)를 하는데, 문화재(文化財)를 사랑하는 마음은 더 없이 넓다. 물론 이러한 일은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이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도 옛 대문(大門)의 지붕은 그대로 보존되어있어 당시의 위풍(威風)을 전해준다. 안채를 헐고 집을 지으면서 대문의 기둥은 적벽돌로 교체하여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안채와 별채, 그리고 사랑채는 모두 전면(前面)을 바라보며 일자(一字)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앞마당이 좁은데다가, 길 건너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앞이 확 트였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현재 사랑채는 1959년부터 원불교(圓佛敎) 교당(敎堂)으로 사용 중인데, 1964년에 13만 8천여 원의 수리비(修理費)를 들여 지금과 같은 법당(法堂)의 면모(面貌)를 갖추었다고 한다.

 

인근에 조해영 가옥과 김안균 가옥이 있어 토석 담장과 한옥 기와지붕 등이 어우러져 전통적(傳統的) 경관(景觀)을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2006년 6월 19일에 ‘함라마을 돌담길’을 등록문화재 제263호로 지정한바 있다. 1918년에 지은 조해영 가옥과 1922년에 지은 김안균 가옥을 살펴보면, 1917년의 이배원 가옥을 많이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이배원 가옥은 두 가옥에 비하여 단순(單純)한 구조(構造)를 가지며, 생활의 편리성(便利性)을 많이 고려(考慮)한 듯하다.

이배원 가옥은 1926년 9월 함열역 앞에 삼성농장을 설립하여 소작인을 1,088명이나 두었던 개화기의 만석꾼 부농주택(富農住宅)으로서, 전통주거의 근대성(近代性)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남동향(南東向)으로 담장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란히 위치하며, 건좌선향(乾坐選向)을 하고 있다. 지금은 이 두 채의 건물이 서로 완전히 분리된 채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작은 연결 복도로 통하던 구조였었다.

 

사랑채는 전후퇴집의 구조이다. 좌측부터 아궁이, 두 칸 방, 두 칸 대청, 건넌방이 이어진다.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그 전면에 높은 누(樓)마루를 두었다. 구조는 장대석 기단(基壇)위에 방형(方形) 초석(礎石)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다. 공포는 익공(翼工)형이며, 소로로 수장하고 있다. 주간은 2.6m로 일정하게 설정하였으며 전면에 유리 미서기문을 설치함으로써 툇마루의 내부 공간의 효율성을 추구하였다.

안채의 건축 수법은 사랑채와 거의 같다. 평면은 좌측부터 건넌방, 대청, 웃방으로 이어지고, 웃방에서 전면으로 두 칸의 안방과 부엌이 돌출된 ㄱ자형이다. 구조는 1고주 5량 가옥이나 평면상으로는 앞뒤로 마루를 달아 낸 전후퇴(前後堆)집의 구조를 띠고 있다.

 

전(傳)하는 자료(資料)로는 이배원의 장자(長子) 이집천(李集阡)이 쓴 1924년의 ‘오당수화(五堂壽畵)’, 1929년의 ‘서벽정시고(棲碧亭詩稿)’가 있다. 이집천은 호를 ‘서벽정(棲碧亭)’, ‘하당(荷堂)’이라 하였으며, 서예가로 교육사업가로 일하였다. 1900년에 태어나서 1959에 세상을 떠났다. 이배원 가족에 대한 비석(碑石) 7기가 함라산 자락 서벽정(棲碧亭) 정자(亭子)터에 남아있으나 2기는 해독(解讀)이 불가(不可)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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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원 가옥은 등록문화재인데 현재 원불교 함라교당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3가구가 거주하며, 그중 하나가 옛 안채를 헐고 현대식으로 지은 집에서 이배원의 손자가, 또 하나는 안채에 딸린 부속채에서 사는 이배원의 큰 손자가, 그리고 흔히들 말하는 원불교 함라교당이 있다. 이 셋은 각각의 담장으로 구분되어있는데, 그 중에 함라교당만 문화재로 등록되었다는 뜻이다.

 

처음 집을 찾아갈때는 원불교 함라교당을 물어서 찾아갔지만, 사실 동네 사람들은 마을의 옛 부잣집들에 대하여 잘 알고있는 편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나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소작인으로 일했을지도 모르는 지주의 집들에 대한 물음인데도 그다지 반감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넉넉했던 수확만큼이나 넉넉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준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높다랗게 솟은 대문가를 서성이다가 사진좀 찍자고 조심스레 말을 걸었을 뿐인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길손을 맞는다. 마침 밭에 일을 하러 대문간을 나서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짜고짜 손을 이끌어 그늘로 안내를 한다.  그러고보니 비 갠 유월의 태양은 따갑게 내려쬐고 있었다.

 

관리인의 이야기는 언제 끝이날지 알 수 없었다. 현재의 문화재에 대하여, 전국의 개인소장문화재 관리인들에 대하여, 문화재 보수작업자들에 대하여, 그리고 나처럼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방문객들에 대하여 참으로 할 말이 많았었나보다.

기와가 떨어져나가고 흙이 흘러내려 풀이 앉은 지붕과 적벽돌로 네 귀퉁이를 쌓은 대문의 기둥, 그리고 안채는 현대식 슬래브 주택으로 지어져 한 공간에 머물러있다. 바로 옆에는 옛 부재를 그대로 간직한채 퇴락한 기와집과, 그리고 다시 기와를 얹어 말쑥하게 단장을 하고 여기저기 손을 본 함라교당까지, 이배원 가옥은 옛 영화를 간직한채 풍상을 견디지 못하고, 집따로 대문따로 그렇게 그렇게 세월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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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문의 오른쪽으로 현대식 슬래브주택이 보인다.

 

안채의 별채로 현재는 이배원의 손자가 살고 있음.

 

 

아래는 사랑채로 현재 원불교 함라교당으로 사용중.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해주던 담장.

 

왼쪽이 안채의 별채, 오른쪽의 사랑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