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31.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입성한 화산천주교회

꿈꾸는 세상살이 2010. 5. 6. 11:23

화산천주교회(華山天主敎會)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1158-6번지에 있는 화산천주교회는 천주교재단에서 관리하며, 1987년 7월 10일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인근 27,822㎡에 해당하며 본당과 종탑, 사제관 등이 있다. 일반적인 천주교회는 교회명이 바로 동명이거나 시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곳 화산천주교회는 오래된 교회로 당시의 주된 생활근거지였던 화산리의 이름을 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이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주교, 다블뤼신부와 함께 조선 헌종 11년 1845년 10월 12일 황산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1906년 건축한 이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카톨릭이 가장 어려웠던 1929년에 신도 3,20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큰 본당이었으며, 일제시대와 6·25 전쟁 속에서도 성체(聖體) 등(燈)이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대건은 중국 마카오에서 6년간의 신학수업을 마친 후 상해 인근 금가항(金家港)에서 1845년 8월 17일 신부 서품을 받았다. 이는 1784년 조선교회가 창립된 이래 61년만의 일이었다. 김대건신부는 1845년 10월 12일 당시 황산포(黃山浦)였던 현재의 나바위에 상륙하여 포교하다가 서울로 향했다. 이듬해인 1846년 6월 5일 체포되고, 9월 6일 새남터에서 25세 때 ‘사학괴수’라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받았다. 1925년 복자(福者)로, 1985년 5월 5일 성인(聖人)에 시성되었다.

여기 화산리에 천주교회가 생긴 것은 1897년 한국명으로 장약실, 원명 베르모레르(Verimoree) 신부가 부임하고 부터다. 1906년 베르모레르 신부가 감독과 설계를 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동원하였다. 당시에는 목조건축으로 앞면 5칸, 옆면 13칸이었는데, 1916년 고딕식 건축물인 종각을 덧붙여 증축하면서 일부분을 벽돌로 바꾸므로 한식과 양식이 혼합되었다. 이때 툇간 마루를 없애고 회랑으로 변형하였다. 내부 공간은 회중식과 통로의 구별은 없고 8개의 기둥열에 의해 구분된다. 1922년에는 요셉 까다르(Josepus Cadars) 신부가 바깥기둥 밑부분을 돌기둥(石柱)으로 바꾸었으며, 1982년 종각의 내부를 수리하였다.

이곳은 건물의 특이성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첫발을 디딘 지역이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는 곳이다. 형태는 2층 건물과 비슷하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에, 천장은 판자로 처리했고 바닥에 널판지를 깔았다. 평면은 장방형으로 네이브와 아일없이 중앙에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들을 세워 보를 받치는데, 본래에는 이 기둥들에 칸막이를 두어 남녀 신도석을 구분하였다고 한다.

중앙에는 예수상이, 왼편에는 요셉상, 오른편에 마리아상이 있다. 그 앞에는 미사를 집례하는 제단이 있고, 많은 성물(聖物)들은 건축당시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색상이나 원형이 잘 보존되어있다.

제대(祭臺)가 있는 곳은 반원아치(Rounded arch)로 천장을 받치고 있다. 외부 정면은 잘 다듬은 석재로 기초부를 이루고, 그 위에 벽돌쌓기의 종탑부를 두었다. 종탑부의 모서리는 후렛버트레스(Flat buttress)가 직교되게 하였다. 본당의 지붕은 합각을 형성한 팔작지붕으로 한식기와를 얹었고, 지붕 아래에는 팔각 채광창을 두었는데 이는 분명 팔괘의 상징이라 생각된다. 특히 양측면에는 개방된 회랑이 있는데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하고, 연등천장을 이루어 도리와 보(梁) 등 한국적인 건축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지금은 본당 외에 수녀관, 사제관, 강당, 피정의 집 등이 있다. 연 건평이 약 200여 평에 달하는 본당은 전체적으로 볼 때 천주교가 이 땅에 정착하면서 서양식 성당건축을 짓지 않고, 한국 전통적인 목조건축과 조화되도록 절충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뜻을 가진다. 뒷산에 베르모레르 신부와 김대건 신부의 순교기념비가 있다.

1908년에는 베르모레르 신부를 창설자로, 김두환을 교장, 박익래를 교감, 서재양을 학감으로 하고 이종갑과 이규하를 교사로 하는 계명(啓明)학교를 열었다. 창설자는 물론 교장과 학부형들이 적극 가담하여 교육기금을 마련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식비를 지원하는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었다.

개교 첫해에 30명이던 학생이 다음해에 50명으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25년 10월 15일에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1926년 자진 폐교하기에 이른다.

1929년에 다시 문을 열어 1936년에는 학생수가 225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1941년 4월 학교명칭 변경으로 계명학교는 1945년 5월 망성국민학교의 분교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미군정 시절에는 주임신부의 노력으로 1946년 6월 15일 다시 계명학교로 간판을 고쳐 달기도 하였으나, 1947년 11월 6일 폐교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학교를 운영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계명학교의 책임자였던 이철우가 운영에 대하여 고의로 방치했었다는 것이다. 이는 1947년 4월 14일 새로 부임한 김영국신부의 판단에 따라 회복이 불가하다고 내린 결론이었다.

당시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교육기관의 창설이 봇물을 이루던 때에, 인근에서 근대적 교육기관으로서 효시(嚆矢)를 이루었던 계명학교의 폐교는 커다란 손실이었다.

 

천주교는 교리의 특성상 개신교에 비하여 엄격하게 느껴지나, 사실은 행동에 자유스러운 부분도 많다. 다만 장엄하고 제도적이며 절차를 중요시한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전통 깊은 유교에서 사람대신 신을 믿어야한다는 종교는 사악한 악의 존재와 다름없었다. 그러기에 초창기 신자들은 박해와 순교를 강요당하기 일쑤였었다. 인근에도 전주에 진북동숲정이성지가 있고, 치명자산성지도 있다. 익산에는 여산에 숲정이성지가 있으며, 바로 인근의 백지사터, 천호산 기슭에 천호성지가 있다.

이런 종교적 성지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지역 주민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순교를 강요한 일에 대해서 부끄럽게 여겨지지만, 그것이야 내가 행한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익산은 이렇게 종교적으로도 부끄럽지 않은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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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8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