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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지키기

꿈꾸는 세상살이 2012. 9. 12. 08:31

예향지키기


우리지역에는 아주 오래 된 정자가 많다. 예를 들면 전주의 한벽당(정면 3칸 측면 2칸)과 남원의 광한루(정면 5칸 측면 4칸), 정읍의 피향정(정면 5칸 측면 4칸)등이 그것이다. 또한 무주의 한풍루(정면 3칸 측면 4칸)도 그렇거니와 임실의 양요정(정면 3칸 측면 3칸)과 익산의 함벽정(정면 7칸 측면 5칸), 군산의 자천대(정면 3칸 측면 1칸), 순창의 귀래정(정면 3칸 측면 2칸), 고창의 취석정(정면 3칸 측면 3칸), 진안의 태고정(정면 3칸 측면 2칸), 장수의 자악적(정면 2칸 측면 2칸) 역시 유명한 정자에 속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한 지역을 대표하는 정자라 해도 이해가 되는 것들이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 나열하지 않았어도 수많은 정자들이 더 있다. 

그러면 이런 정자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때로는 한 고을의 수장이 머물면서 정사를 보거나 유력한 지도자가 계몽선도를 같이하던 곳도 있을 것이지만, 대부분은 시인묵객들이 글을 읊고 자연을 노래하였던 곳이다. 정자는 그 당시 얼마나 유명한 풍류객이었는지, 일하지 않아도 얼마나 여유가 있어 시나 읊었는지, 과거를 보려는 양반들이 오며가며 감흥을 시험하던 곳이었는지를 헤아리는 것도 아주 중요한 연구대상에 속한다. 하지만 이런 곳이 각 지역에 산재해 있고, 마을마다 빠짐없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예전의 정자는 주인이 소일하거나 문학과 서예를 하면서 여흥을 돋우는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마침 지나는 선비가 있다거나 일부러 찾아온 벗이 있을 때 대동하여 풍류를 잡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작품이 증인처럼 정자에 남아있고 더러는 서책에 전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정자의 문화예술적 가치라 할 것이다. 그와 더불어 눈에 보이는 건축양식은 고건축에 대한 역사적 자료이면서 학술적 가치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피향정은 호남 제일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있을 적에 두 개의 연못을 파니 상연지와 하연지가 되었으나, 현재는 하연지만 존재하며 거기에 지은 피향정이 전한다. 연지는 희귀한 가시연꽃이 자생하여 유명세를 타기도 하였지만, 그것이야 인공으로 심으면 해결되는 것이니 그다지 중요할 일도 아니다. 말하자면 역사성이요 불변의 증거들이 우리의 잠재의식을 일깨울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매장문화재를 통하여 선조들의 기술이 현재에도 적용되고 있음에 감탄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자긍심을 높이는데 적극성을 띠기도 한다. 이렇게 보이는 실체를 통하여야만 예전의 문화가 확인되고 검증되기 때문이다.


작은 연못을 파고 거기에 물을 흐르게 한 뒤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시를 읊던 곳이 있다. 우리 역사에 나오는 경주의 포석정이 그런 곳이다. 한 사람이 시를 짓고 술잔을 띄우면 그 잔이 다음사람에게 오기 전에 시 한 수를 읊고 술잔을 들어야 하는 놀이를 하였다는 곳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 특이할 것 같은 곳이 중국에도 있었다. 강소성의 유산곡수가 그것인데,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와서 정읍 칠보에 유상대를 만들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것들은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너무나 호화스럽고 사치스런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술 한 잔을 마실 여유에 시 한 수를 지어낼 수 있는 정도의 선비들이 모여 있던 고장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알다시피 한시는 글자 수에 제한을 두는 것은 물론이며, 기승전결은 기본이요 자모나 받침까지도 따져서 지어내는 어려운 시다. 지금 지어도 어려운 것이 한시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조차도 어려워하는 것이 현실이다. 무지랭이 같아 보이고 우둔할 것만 같은 선조들이 그러했었는데, 나 잘났다는 지금은 어떤가. 나는 지금 선조들이 지녔던 문학적 그리고 감각적인 예술성을 말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