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나의 주변 이야기

25년 세월이 이력서 단 한 줄뿐...

꿈꾸는 세상살이 2007. 5. 12. 07:43
 

이력서를 쓰면서

 

사직하기로 작정을 하자 마음이 착잡하였다. 때는 춘삼월이라 날은 맑고 화창하였지만, 내 마음속은 항상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여기저기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평상시답지 않게 더 밝고 호탕하게 하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반발심, 도망가고 싶은 마음, 가면 뒤에 숨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만나 여러 얘기를 하다보니 마침 잘 왔다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공장을 확장하고 새로운 책임자를 구하는 중인데 내가 적임자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혹하는 마음이 생겼다. 처음부터 계획하던 일과 비교하여 그리 나쁘지도 않을 듯하고, 어쩌면 더 나아도 보였다. 예전까지 해왔던 일과 내용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그래도 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고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렵게 마음을 다잡으며 새로 시작해보자던 결심을 꺾고 또 다른 각오를 해야 하는 점이었다. 그래도 흔하지 않은 기회라는 유혹이 힘들고 고달플 것이라는 우려보다도 높이 손을 들었다. 그제서야 다른 생각들도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이 있을 터인데 조금 다른 일이라고 해서 못할 것도 없다는 격려였다.

 

한 직장에서 25년간 일하는 동안 잊고 살았던 이력서를 써보았다. 제대후 처음 이력서를 쓰던 생각이 났다. 성명, 본적, 주소, 생년월일 등. 그리고 학력과 경력, 이력서의 양식이라는 것이 그때와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빈 칸을 하나하나 메워 가는데 씌여 진 단어들도 변한 것이 없었다. 태어나고, 자라고, 학교에 다니고, 자격증 몇 개를 취득한 후, 군에 갔다 와서 직장을 다닌 것이 전부였다. 제대할 때까지는 제법 여러 줄로 메워 가더니, 정작 직장을 다닌 후에는 쓸 말이 없다. 똑 같은 25년간을 생활하였건만 단 한 줄로 표현되었다.

이력서를 쓰고 보니 나의 25년 인생이 내세울 것 없는 삶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력서를 많이 메운 것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단 한 줄의 삶이었다니 뭔가 부끄러워졌다. 아침 7시 집을 나섰다가 저녁 9시에 도착하는 삶의 연속이었지만 뭔가 남아 있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인생은 곧 삶이고,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일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일하는 동안 가정을 이루고 가족들이 평안한 생활을 영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직장, 다른 일을 하면서도 영위되는 것이니, 그 외에 또 다른 뭔가로 부족하게 생각되었다.

신성한 노동 앞에서는 인생이 곧 일이니 다른 것을 바라면 욕심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일하는 즐거움과 거기서 얻는 성취감, 그리고 만족감으로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도 이러한 근로기본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외에 나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였던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국가를 위하여, 직장을 위하여, 좁게는 조직과 이웃을 위하여, 그리고 최소한 나를 위하여 무엇을 노력하였는가하는 생각들이다.

 

말로만 열심히 살았고 문자로만 창의적이었는데, 행동으로는 어제와 같은 오늘이 계속되었던 것에 대한 후회다. 지금 나의 모습이 새로운 이력서를 쓰면서 기록될 다른 한 줄이기를 바라니 행동에 조심스러워진다. 다시는 이력서를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느 날이 후회스럽지 않은 삶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기를 바래본다.  (2006.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