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를 몽골이라 불렀다.
그가 몽골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유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생김세로 보아 살이 오동통하니 오르고, 쌀가루를 몽글게 만들어 빚은 송편 같다고 하여 붙여진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몽골이라고 하여 내몽고, 외몽고의 나라 이름 몽골이 아니라 그냥 붙여진 의태어이다. 그런데 그 이름이 과히 부르기 거북하다거나, 상대방을 비하하는 별명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것은 무슨 때문인지 모르겠다. 물론 처음부터 트집을 잡거나 무시하는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에도 공감한다.
몽골이 벌써 몇 해 전에 다녀갔었다. 그 전에도 한두 번 본적은 있었지만, 근래에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소위 말하는 어른이 되고 생활의 기반을 잡고 나서는 각자의 활동반경 안에서 움직이다보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골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예전에 비해 살이 빠진 것이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하긴 요즘 사람들에게 있어 살이 빠지고 안 빠지고는 어쩌면 아주 커다란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아마도 빅 이슈가 될 것이고, 이제부터는 안몽골이라 불러야 합당하지 싶다.
그런 몽골이 고향에 왔었다. 몽골이 우리와 친선 사절을 맺은 것도 아니고, 국교 정상화를 한 것도 아닌데, 옛 고향 시골에 몽골이 나타난 것이다. 힘들게 찾아 왔다가 겨우 저녁 밥 한 그릇을 먹고는 돌아 갈 것을, 700리 길도 머다 않고 허위허위 달려온 것이다. 하긴 그렇게 먼 길을 왔으니 고향 집 부모님 댁에서 하룻밤 유하고 가리라 생각하면 그만이겠지만, 아쉽게도 그분들도 모두 고향을 떠나서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신다고 하니 그것이 문제였다. 물론 친척들이 계시기는 하지만 모두가 장성하여 각자가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니 생각대로 편한 일도 아닌 것이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전에도 자주 고향을 찾았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나 의외로 대답은 간결하였다. 부모님이 안 계신 고향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로 그저 말뿐인 고향이었다고 하였다. 친구들은 몽골이 보고 싶다고, 고향으로 올 수 없겠느냐고 하니 단 숨에 달려온 그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뭔가가 확실하고 내 인생에 있어 보장 받는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흔쾌히 승낙하고 달려 온 그 성의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릴 적 철부지 우정이 길고 긴 인생역정을 돌아서 죽을 때까지 보상 받고도 남을 만큼의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먼 길을 찾아와준 정성이 반가웠다. 보고 싶었던 얼굴들을 모두 만나 본 것도 아니었다. 많은 친구들을 만나 본 것도 아니면서 바로 돌아서야 하는 것이 아쉬워, 길게 펼쳐진 추억의 꼬투리를 한 자락 휘어감아 내려놓고 갔었다. 다음 모임 때도 반드시 불러 달라고, 다음에는 다른 친구들의 얼굴도 볼 수 있도록 수고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었다.
일견 생각하면 자기가 해도 될 일을 꼭 남한테 시켜서 해 달라는 것인가 할 수도 있겠으나,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입장에서 볼 때 기댈 곳은 바로 고향이었다. 고향이 아름다운 풍경을 하고 있지 못해도, 고향에는 풍성한 산물이 없어도, 고향에는 많은 친구들이 남아있지 않아도 고향은 고향인 것이었다. 그런 고향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연민의 정을 불어 넣어주고 있다. 그런 고향을 잊지 않으려고 끈으로 묶어두기도 한다. 그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몽고반점을 떠날 수 없는 것처럼, 몽골도 고향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을 사랑하고 우정을 간직하고 있는 몽골이 더 한층 정겨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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