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가는 길
내가 성주로 향했을 때는 덥지 않은 시원한 날이었다. 날짜로는 9월의 가운데이니 한 가을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덥거나, 샛노란 참외가 길가 노점상들 손위를 오고가는 그런 계절도 아니다. 하늘에는 이리저리 구름이 오가고, 해도 낯을 가리는 듯 얼굴을 보여주고 숨기를 반복하고 있다. 출발할 때부터 구름이 모이면 어두워지고, 몰아치는 바람에 못 이겨 눈물방울이 맺히면 떨어지는 정도의 날씨로 마음을 심란하게 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성주로 가는 길은 코스모스 꽃들이 도로를 점령한지 벌써 오래되어 보이고, 그새를 못 참은 잠자리도 구름과 비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고속도로 허허 벌판에 도대체 숨을 곳이 어디라고 비를 피했다가 나타난 것일까 궁금해진다. 장마는 벌써 마감이 되어 우산을 말려 넣었건만, 때늦은 지각생들이 무더기로 몰려오더니 돌아갈 생각도 안하더니 보름 남짓이나 퍼질러 앉았다. 그런 틈에서도 녀석들의 날개는 잘 다려진 망사처럼 아직도 고슬고슬하기만 하다.
성주는 내가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특별히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왠지 다정한 느낌을 주는 고장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과거 어느 날 지인의 고향이 성주여서 그랬을까, 향긋하면서도 단내가 물씬 풍기는 참외를 먹고 싶어서 그랬을까. 작지만 그러면서도 어딘지 격리되고 도시의 변방으로 들어앉은 듯한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그런 성주로 지금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아침밥을 먹을 때만 해도 아무런 계획이 없었지만 오전 10시가 되어 갑자기 성주행을 결정하였다. 휴가가 오늘인데 출발하는 당일 갑자기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들은 뒤의 일이다. 말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휴가를 가도록 되어 있다지만 이러기를 벌써 몇 달째다. 하긴 지금까지 이런저런 사정으로 취소되었으니 오늘도 그런가보다 하면 그만일 것을 수선을 피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단 한 가지 태풍 나리가 다가오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단다. 과연 상전 나리가 무섭기는 한가보다.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반국도를 좋아한다. 홀가분한 국도는 여러 지방의 산천경개를 감상하게도 하고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거기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있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도 있다. 태풍이 온다는데도 만사 제쳐두고 가는 나의 위치를 알 수가 있고,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존재가치를 느끼기도 한다. 물론 고속도로야 그가 가진 장점이 있으니 굳이 비교하여 따질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국도에서 더 편안한 느낌을 얻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속내로는 산천경개나 내 마음의 평화보다 우선 하는 것이 있으니, 나의 갈 길이 급하다. 성주가 나에게 가져다주는 그 어떤 것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성주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는 오로지 외길, 도망갈 길이나 멈춰버릴 길도 없는 그 길을 좇아 날아가고 있다. 어쩌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조금의 쉼도 없이 그냥 달리고 또 달리는 전차의 진격일지도 모르겠다.
내 가는 모습을 돌아보니 흡사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고 또 돌리는 것에 영락없다. 아니면 어쩌면 도깨비불에 홀린 묘지의 나그네처럼 그냥 허우적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지금 성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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