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고대 도시 수도의 자격 요건을 모두 갖춘 익산 왕궁리유적

꿈꾸는 세상살이 2009. 2. 4. 10:59

 

왕궁리 유적의 어제와 오늘


왕궁리 유적 전시관 개관 과정에서 왕궁리 유적과 관련된 자료의 수집정리가 가정 먼저 이루어져야 할 작업 중의 하나이다. 왕궁리 유적에 대한 기록은 그동안 발굴조사를 추진하면서 어느 정도 검토와 정리가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전시관 개관 기획전시에서는 문헌기록 이외의 사진자료와 실측도면, 지도 등을 모아 정리하는 의미로 ‘왕궁리 유적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를 달았다.

 

기획 전시 자료는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보관중인 유리원판 사진자료, 원광대학교 마한백제 문화연구소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왕궁리 유적 발굴조사단의 발굴조사 자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동안 개별 논문과 글에서 다루어진 사진과 도면을 하나 둘씩 모아가는 과정에서 석탑의 사진과 도면뿐만 아니라 1940년 경의 오층석탑 실측도면과 1965년 왕궁리 5층석탑 해체보수 과정의 사진도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통하여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왕궁리 5층 석탑은 미륵사지와 함께 그동안 주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소풍장소로 가장 많이 찾던 곳이었다. 그러한 과정에 남겨진 사진이 몇 점 입수되어 이번 기회에 지나온 날들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도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왕궁리 유적 전시관 개관기념 기획전시는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가는 자료의 수집을 통해 과거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계획하였는데, 앞으로도 가능한 매년 1회 이상 기획 전시를 마련하여 왕궁리 유적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 정리해 나갈 계획이다.


백제의 베일이 벗겨지다.

무왕의 꿈이 깃든 왕궁성, 왕궁리유적

경주, 부여, 공주 그리고 익산, 이 네 도시의 공통점은 바로 대한민국의 4대 고도(古都)로 선정된 도시라는 점이다. 옛 수도로 유명한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익산에 궁전이 있었다는 것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였다. 하지만 근래 몇 년 사이, 백제 유적발굴단에 의해 신비로운 비밀이 하나씩 세상에 드러나며 익산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로써 익산은 능과 성 그리고 궁과 사찰 등 고대 국가 수도로서의 자격 요건을 모두 갖춘 남한 내의 유일한 도시가 되었다. 이제 고도 익산을 통하여 천 년을 거슬러 오르는 여행이 시작된다.


왕궁리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서

근처의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와 함께 최대 규모의 백제 유적으로 꼽히는 왕궁리 유적, 남다른 마을의 이름이다. 지정면적 216,862m² 약 65,700평의 넓은 규모를 놓고, 그동안 제시된 학설만 하여도 여러 가지였다. 기원전 2세기 초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정권을 뺏기고 남쪽으로 피신해서 세웠다는 마한 기준도읍설, 백제 무왕이 수도를 옮기려고 왕궁성을 쌓았다는 천도 및 별도설, 통일신라 때 고구려의 왕족 출신인 안승을 소고구려의 왕으로 삼아 정착시킨 곳이라는 설, 통일신라 말기 견훤의 후백제 도읍설까지 하나의 유적을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나왔던 장소가 또 있었을까.

하지만 여러 기록조사와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백제 후기에 처음 세워진 유적이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외부의 침입으로 사라진 백제는 가장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나라다. 하지만 그 훌륭한 문화는 바다 건너 일본까지 전파되었다. 백제의 30대인 무왕 대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이곳은 과연 어떤 장소였을까.


백제의 왕궁에 발을 내딛다.

2008년 12월 23일에 개관한 왕궁리유적전시관을 지나 오랜 세월 홀로 이 자리를 지켜오던 오층석탑으로 향하는 길. 단아한 석탑의 주위는 비닐과천으로 덮여있고, 그 입구의 오른쪽으로 는 작은 유물전시관과 유적발굴단의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다. 벚나무 사이로 나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어보자. 돌벽과 기반을 보아 이곳은 건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인들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군데군데 놓인 발굴현황도가 조금이나마 이해를 돕는다.

이곳 왕궁리 발굴현장은 우리가 잃어버린 백제로 향하는 타임머신과도 같다. 현재 4차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왕궁리는 전체 면적의 2/3가량이 발굴된 상태다. 1989년 백제 문화권 유적 정비사업으로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니 어언 20년이다. 강산이 두 번인 바뀔 만큼의 시간의 흐른 지금, 왕궁리는 그간의 침묵을 깨고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화려한 정원에서 공중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발굴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 직사각형의 성벽은 폭이 3m이며, 동서로 240m, 남북으로 490m나 되는 실로 거대한 규모다. 그 안쪽에 임금이 나와서 조회를 하던 궁궐의 중심건물인 정전(政殿)으로 보이는 대형 건물도 확인되었다. 특히할 점은 구릉이었던 왕궁성 안쪽 대지를 평평하게 고른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동서로 120m, 남북으로 160m나 되는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당시 지방 토호로는 불가능하였으니 분명 왕궁리 유적은 왕궁이었거나 그와 견줄만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성안에서는 건물 외에도 정원, 대형 화장실 등 궁궐 내부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다. 백제 왕궁의 정원은 구릉지대의 자연스러운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물을 흐르게 한 자연친화적 구성, 왕과 소수 귀족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비밀의 정원인 후원은 일본의 정원과도 유사하여 후원의 원류로 칭해지며, 당시 궁궐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무왕과 아름다운 선화공주가 함께 거닐었던 정원을 상상하며 유적을 돌아보는 일은 가슴설레기까지 한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삼국시대 최대 규모의 대형화장실 또한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니다. 휴대용 변기, 뒤처리용 나무막대 등 화장실과 관련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며 생활문화를 알게 한 것은 물론, 그 속에서 나온 성분과 세균 등을 통해 고대 식생활까지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왕궁리 유적에서는 공방지, 소토구, 도가니, 금과 유리제품 등을 생산한 관련 시설과 유물도 나왔다. 아직 궁궐 주변의 도시 거주지인 왕경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만약 발굴을 통해 그 흔적을 찾게 된다면 왕궁리에 단순한 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백제의 수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들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오층석탑의 나이는 얼마나 될까.

우리 역사에서 익산 왕궁리 유적은 잠깐 등장했다가 이내 사라진 장소가 아니었다. 발굴을 통한 고고학적 성과로 보아 적어도 30년 정도는 사용했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삼국사기, 금마지 등의 옛 기록을 보면 왕궁리(王宮里)의 왕궁은 백제 30대 무왕 대에 조성되어 고려시대까지 유지 운영되었음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세월을 거치며 궁궐로만 사용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층석탑을 비롯해서 무왕때에 건립했다는 제석정사지(帝釋精舍址)와,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사찰시설이 발견되었으며 ‘왕궁사’, ‘관궁사’ 등을 적은 명문와들도 있었다.

그중 국보 제289호로 지정되어 있는 왕궁리오층석탑 또한 아직도 비밀의 탑이다. 높이 9.3m의 백제계 석탑인 오층석탑은 본디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97년 다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신분이 상승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내부에서 발견된 유물들 또한 고려유물로 알려지며 국보 제123호로 일괄 지정되었지만, 최근 연구결과 금동사리함, 금강경판 등은 백제의 유물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석탑의 나이에 대해서도 백제에서 고려 초기까지 그 의견이 분분한 상태다. 이렇게 베일에 쌓여있을지라도 기품있는 모습으로 천년 이상을 왕궁리에 서 있던 석탑은 과거에도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기만 하다.


왕궁리!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이렇게 큰 왕궁을 지은 무왕은 이곳을 어떤 용도로 사용한 것일까. 이와 관련해 조선후기 지리학자였던 김정호는 자신이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본래 백제의 금마지(金馬只)인데 무강왕때 성을 쌓고 별도(別都)를 두어 금마저(金馬渚)라고 불렀다’하였다.

백제 무왕이 세운 제2의 도읍이라는 뜻이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백제 무왕시대에 지금의 부여인 사비를 수도로 하고, 익산은 별도의 정치 중심인 도시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리 유적의 성격에 관해서도 연구자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백제가 무왕시대에 아예 이곳 익산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김정호의 기록에 충실해 별도를 두고 통치하였다는 이도 있다. 그 외에도 왕이 일정기간 머물며 정사를 보거나 휴식을 취하는 형식의 이궁(離宮)이거나, 행차때 잠시 머무는 행궁(行宮)일 것이라는 이도 있다. 현재로서는 뚜렷한 결론을 낼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적어도 무왕시대에 백제는 왕성에 버금가는 국가의 중추 시설을 익산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옹궁리 유적의 부활을 기대하며

지금은 허허벌판이 된 왕궁리에서 거대한 건물을 짓고 살았을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그려본다. 남한에 옛 궁궐의 원형이 남아있는 지역은 왕궁리와 한성 풍납토성뿐이며, 특히 백제궁으로서는 왕궁리가 유일한 곳이다. 과거 한나라의 수도였다는 부여, 공주, 경주가 사찰과 성, 그리고 능이 발견되었으나 아직 확실한 궁의 흔적을 찾지 못한 것에 비하면 그 의미가 얼마나 큰지 짐작해볼 만하다.

익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동, 즉 무왕은 자신의 고향이자 정치적 배경이 된 익산을 중요시 여겼을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의 수도에서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의 세력 약화와 백제의 새로운 부활을 꿈꾸며 익산에 동양 최대의 사찰 미륵사를 세우고 왕궁리에 궁궐을 세웠다. 그리고 익산으로 천도를 노렸던 꿈이 이루어졌든지 아니면 이루지 못했든지 무왕과 무왕비는 그들이 사랑하고 아꼈던 익산에 묻혔을 것이니 그곳이 바로 쌍릉이다. 결국 그 꿈을 다 피우지 못하고 아들인 의자왕은 부여에서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서의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아직도 무왕의 꿈은 익산에 남아있고, 현재의 우리들에게 미지의 세계인 백제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 왕궁리 유적의 발굴이 마무리되기까지 10여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발굴조사가 끝나고 백제의 화려했던 과거가 우리 눈앞에 부활하게 될 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한 번 훼손된 유적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고, 후세에게 더 많은 자료를 남길 수 있도록 신중하고 정확한 발굴이 이루이지길 기원한다.


백제의 궁궐문화, 왕궁리에서 만나요.

백제시대의 왕궁과 생활상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왕궁리 유적전시관이 2008년 12월 23일 개관하였다. 2004년에 착공하여 지하1층, 지상1층으로 총 2,250m²규모의 건물이 완공되었다. 부여백제문화연구소가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한 6,400여 점의 유물 중 국립전주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던 2,300여 점을 돌려받게 된다. 이 가운데 백제의 중심지에서나 볼 수 있는 기와 및 와당, 토기, 각종 생활용품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400여 점이 상시 전시중이다.

특히 너무 큰 규모이고 계속 발굴중이라 직접 살펴볼 수 없었던 왕궁리 유적지 전체의 모형이 전시되며, 특수 영상기법을 통한 설명과 궁성 축조체험 코너도 갖춰진다. 공방과 관련해서는 금 원료막대와 유리로 만들어진 옥 제품, 각종 도가니 등도 접할 수 있다. 앞으로 계속하여 발굴되는 유물은 이곳에 보관하고 전시할 계획이다.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보고인 이 왕궁리 유적지에 학생들이 많이 찾아오고, 우리 선조들의 문화를 체험하며 더욱 아름다운 우리 문화로 계승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란다. 


자료출처 : 익산시 홍보실/문화관광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