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35. 익산 최대의 인구밀집지인 영등동유적

꿈꾸는 세상살이 2009. 4. 2. 09:16

영등동유적(永登洞遺蹟)

 

전라북도 익산시 영등동 814번지는 영등시민공원이다. 여기에 커다란 무덤형태의 구릉이 있는데 2002년 5월 30일 익산시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하여 영등동유적이라 부른다.

 

영등동유적지는 영등동택지개발 과정에서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청동기시대 장방형(長方形)집터 3기와 원형(圓形)집터 2기 등 총 5기의 집터가 남아있던 곳이다.

이중에서 장방형집터 1기는 본래의 영등유적지에 있었고, 나머지 4기는 조금 떨어진 주변지역에서 이전해 온 것들이다. 지금은 조사 후 모두 복토하여 흔적을 찾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각자를 여러 곳에 널려놓을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호남 최초의 초기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주구묘가 확인된 지역이다.

 

영등동 택지조성 전에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마제석부(磨製石斧)와 무문토기편, 화살촉과 돌도끼 등이 수습되었으며, 1995년부터 1996년 까지 3차에 걸쳐 조사한 결과 3개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주거지 장방형집터 7기, 방형집터 5기, 원형집터 12기와 원삼국 마한시대의 주구묘 5기가 조사되었다.

영등동유적에서 마한시대의 수장급 묘로 보이는 주구묘(主構墓) 1구가 조사됨으로서, 익산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된 청동기문화의 계통을 파악하고 마한시대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 되었다.

 

한편 2지구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장방형주거를 감싸고 있는 5중의 주구내에서, 원삼국시대의 토기편들이 다수 출토됨으로써 내부의 주거지와 아주 다른 시간상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인구가 적었던 관계로 생활터전과 분묘 등의 영역 조성범위가 극히 좁은 제한적 공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주거지는 평면 형태에 따라 장방형, 방형, 원형으로 구분된다. 장방형주거지는 전기무문토기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내부에는 노지가 설치되었고, 벽을 따라 구(溝)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출토유물은 청동기시대의 전기에 해당하는 가락동식토기와 반월형석도, 석검, 삼각형만입석촉 등이 있으며, 철부 1점과 파손된 철부 1점도 발견되었다. 방형과 원형주거지에서는 중기무문토기시대의 송국리형 주거지와 같은 유형이었으며, 출토유물은 외반구연송국리형토기, 유경시석촉, 삼각형석도 등이 있었다.

이를 근거로 영등동유적지를 분석해보면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영등동유적은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이 나타나는 주거지유적이며, 그 다음에 나타나는 초기삼국시대의 영등동유적은 사람이 죽어서 묻은 무덤유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원전 1000년~800년에 해당하는 영등동 유적지는 장방형으로 나타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집자리 유적지로 가락동식 토기와 구순각목문토기가 발견되었다. 이와 함께 석촉들도 많이 발견됨으로써 당시 수렵생활의 실상을 알게 해준다.

금강 하류의 퇴적층이 쌓여 비옥한 토지와 낮은 산으로 이루어진 넓은 평야를 가진 영등동 유적지는 당시 농경사회와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를 증명할 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는데, 이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부송동 유적지에서는 볍씨자국이 있는 토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동일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벼의 수확에 필요한 도구로 보이는 석기들이 같이 출토된 것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영등동유적지에서 어망추가 발견된 것은 어로생활을 짐작케 하며, 석제방추차나 토제방추차가 발견된 것은 당시에도 방직물에 의한 의생활을 영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같은 내용과 발굴현장으로 종합해보면 부송동유적지와 영등동유적지는 대표적인 집자리유적지라 할 것이다. 인근의 완주 반교리집자리유적지와 전주의 여의동집자리유적지가 유사한 형태이다. 부송동집자리유적지는 전형적인 송국리형태의 집자리유적으로 기원전 8세기~7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물이 발굴된 제1지구와 제2지구는 현재 시가지로서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제3지구는 영등시민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세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영등공원 정상부에 영등동유적지를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

 

영등동유적이 있는 영등시민공원은 주거가 밀집된 곳으로 유동인구도 많고 찾는 이도 많은 곳이다. 게다가 바로 옆에 시립도서관, 초등학교, 다목적운동장 등이 있어 시민들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모여든다. 나도 한때는 이 영등도서관에 들렀던 적이 있다.

지금은 시립도서관의 본관이 마동도서관에서 영등동도서관으로 바뀌었지만, 전에는 익산시립도서관 영등분관이었던 시절이었다. 새로 지은 깨끗한 곳에서 책도 읽고 모임도 갖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집에서 가까운 마동도서관을 더 이용하는 편이다.

그래도 도서관에 가는 일 외에는 영등동에 갈일이 더 많아졌다. 몇 개의 관청을 빼고는 익산의 모든 편의시설이 영등동 신사가지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상권이 중앙동에서 영등동으로 옮겨왔고, 교통편이나 학교 등 교육시설도 전혀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지역자체도 넓고 인구도 과밀하여 생활의 중심이 된지 오래다. 복잡하고 오밀조밀한 구도심보다 계획적으로 지어진 신도심이 이래서 좋은가 보다.

 

그렇다면 익산시내에 국한하지 말고 눈을 대외적으로 돌려보자. 익산은 군산의 새만금과 전주의 기존 도시생활권에 끼어 옹색한 형편이다. 그러면서 김제처럼 완전한 농촌도시도 아니고 부안처럼 어촌도시도 아니다.

익산에 산이 없어 산촌과는 애시당초 거리가 먼 곳이다. 그렇다면 익산이 영등동의 신도심과 같은 효과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단 한 가지, 인구의 자연스런 증가와 인위적인 인구유입이다.

 

영등동유적지가 호남 최초의 삼국시대 초기 주거지였던 것처럼, 초광역권 주거시대에 익산이 다시 호남 최초의 중심주거지가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그 노력에는 사람이 살아서 활동하기 좋은 곳, 사람이 이동하기 좋은 곳, 사는 사람들의 문화수준이 높은 곳, 사는 사람 모두가 행복감을 느끼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 ‘시민 모두가 행복한 도시’라는 슬로건에 맞게 지금 내가 행복한가 물어본다. 그 걸림돌에 무엇이 있는가를 반성해보자.

 

익산(益山)! 산을 더해야만 좋은 곳이라는 뜻인지, 산이 있어 이로운 곳이라는 뜻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익산처럼 산이 없는 곳에서 성장한 도시가 또 있을까. 게다가 여느 도시처럼 시내에 강을 끼고 있는 곳도 아니면서 발전한 도시가 또 있을까.

최근에는 인공으로 만든 도시가 생겨나고 주거전용이나 생산전용지역으로 거듭나기도 하지만, 익산과 같은 환경에서 예전부터 자연발생적 도시가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그것도 벌써 3,000년 전부터. 그렇다면 익산은 분명 축복받은 도시다.

 

아름다운 도시, 문화가 있는 도시, 삶이 행복한 도시, 이제 익산은 그런 도시로 제 자리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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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6 익산투데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