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33. 중국의 주지번이 썼다는 편액을 간직한 망모당

꿈꾸는 세상살이 2010. 6. 26. 09:13

망모당(望慕堂)

 

전북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장암마을에 있는 망모당은 산비탈에 서있는 정자인데, 1979년 12월 27일에 시도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송병호의 소유로 조상을 기리는 마음이 가득한 정자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가 은거하던 곳의 후원에 세워진 누각을 가리킨다. 송영구는 선조 40년 1607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집 뒤 언덕에 누각을 지었다. 그런 후 그곳에서 동쪽에 떨어져 보이는 우산(紆山)에 모셔져 있는 조상들을 망모(望慕)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송영구는 조선명종 11년 1556년 9월 5일에 출생하였다. 출생장소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장한 곳은 이곳 광암리였다고 한다. 선조 10년 1577년 해평 윤씨와 결혼하였고, 선조 17년 1584년에 서총대에서 실시한 정시(庭試) 문과에서 병과(丙科)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선조 20년 1587년 11월 22일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관직을 사임하고 여묘살이를 하던 중 1588년 7월 10일에 어머니, 9월 6일에는 할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누당은 정사방(正四方)의 3칸으로 합쳐서 9칸 집인데 오른쪽 1칸에 방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며, 방과 마루는 문 4짝으로 벽면이 없이 완전히 통하게 만들었다. 앞면에 있는 4개의 주춧돌은 1m 정도의 누(樓)마루 형태의 높이로 마치 돌기둥과 같다. 기둥 위에 윗 부재를 받치는 첨차(詹遮)를 놓아 굴도리 밑의 장혀를 받친 것이나, 난간두겁대의 받침기둥을 가늘고 긴 닭의 발모양인 계자각(鷄子脚)으로 다듬은 것 등은 특색 있는 점이라 하겠다. 마루의 뒷면은 지반을 계단식으로 다져 얕게 세웠다.

‘망모당(望慕堂)’이라는 당액은 중국의 주지번(朱之蕃)이 1606년 사절단장으로 왔다가 표옹 선생을 찾아 서책 80권을 선물하고, 표옹이 망모하던 누정의 당액을 보고 고쳐 써 준 것이라고 한다. 또 별도로 표옹의 사후 음택지도 잡아주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주지번이 광암리에 도착하였을때는 이미 표옹이 죽은 후였다는 설도 있으나 전자일 경우가 더 설득력이 있다. 표옹의 묘소는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송산(松山)의 선영하에 있다. 이곳을 제촌(濟村)이라 부르기도 하며 송산은 우산(紆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망모당에서 바라본 산은 바로 이 우산이다. 선영의 제각인 ‘우산정사(紆山精舍)’는 호남일대에서는 가장 큰 제각(祭閣)으로 알려져 있다.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1104-1번지에 있는 우산정사는 진천송씨세천으로 그리 넓지 않은 주차장이 있는데 문간채의 양 옆은 민가가 있어 더 이상 뻗지 못하며, 앞으로는 농업용 작은 도랑을 안고 있다. 들판 앞의 좌측 비낀 곳으로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간다.

행랑채는 솟을 대문과 좌우에 3칸씩을 거느린 커다란 제각이다. 또한 본 건물도 정면 5칸으로 보통의 향교 대성전이 3칸인 것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크기이다. 정사 앞에는 동물이 새겨진 석등도 설치되었다. 건물은 모두 전통기와를 얹었으며, 관리사 역시 솟을대문을 한 문간채와 안채를 별도로 둔 독립된 건물이 있다. 주차장 건너편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고목이 되어 가운데가 텅 빈 채로 껍데기만 남아있다.

그래도 아직은 수를 다하지 않았다는 듯이, 마치 표옹을 기다리기나 한다는 듯이 많은 이파리를 달고 위엄을 보이고 있다.

 

표옹과 주지번의 인연은 15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갔던 표옹이 부엌에서 일하던 주지번을 보았는데, 주지번은 마침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글귀를 외고 있었다. 가상히 여겨 사연을 물은 즉, 과거에 낙방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조언을 해준 결과 다음 시험에 합격하였다는 것이다. 이 빚을 갚기 위하여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익산의 왕궁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주지번이다. 이후 주지번은 재상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가 왕궁을 찾던 길에 전주의 객사에 머물면서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는데, 가로 4.66m, 세로 1.79m 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현판이 되었다. 현존하는 객사로는 1471년의 전주객사, 1489년의 거제객사, 1581년의 무장객사, 1652년의 밀양객사, 1704년의 부여객사, 1712년의 신성현객사, 1722년의 낙안객사와 완도객사가 있는데, 이중에서도 전주객사가 가장 빠른 객사(客舍)에 속한다.

전주객사는 보물 583호로, 1598년 전라좌수영 객사로 세워진 여수 진남관은 1718년 중창을 하였고 국보 304호로, 건립연대를 알 수 없는 강릉의 객사 출입문은 국보 51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충북시도유형문화재 49호에 지정된 문산관은 대청댐이 생기면서 1979년에 재현한 건물이다. 당액인 ‘망모당(望慕堂)’과 ‘망모당입의(望慕堂立議)’, ‘망모당상량문(望慕堂上樑文)’, ‘망모당중수기(望慕堂重修記)’ 등이 있고, 망모당의 아래 입구에는 송영구신도비가 있다. 1903년 9월에 쓴 망모당입의를 보면 ‘이 집은 곧 우리 충숙공 선조가 지었으며... 가장 중요한 집인 진정으로 지켜서 보호하거니와 그 외의 부속 건물들도 이에 준하여 잘 간수할 것이므로 자손 중에 무단출입하며 제 마음대로 함부로 하다가 파손시키는 일이 없도록 한다.’ 라고 하였으며, 중수기에는 망모당 옆에 본 집이 있었으나 본가의 서쪽으로 조금 옮겨 세웠다는 기록도 나온다.

 

송영구신도비를 보면 ‘송영구는 강직한 성품을 가져 의롭게 살려고 애쓴 사람이다. 관직에 나아가서는 청렴결백하였고 자기의 직무에 충실하였으며 백성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는 행동거지가 분명하였고 항상 떳떳한 태도로 살았다. 중략. 그리고 그는 전주 화산서원(華山書院)에 제향되었다.’라고 적었다.

 

망모당 부근에는 100 여 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가 있어 장암(長巖)마을이라 하였다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주위에는 맑고 깨끗한 왕궁천의 시냇물이 흐르며, 연지는 중국의 흰 연꽃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와 연꽃 연못을 만든 풍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문화재를 설명하면서 연지가 등장하는 곳은 함벽정이다. 함벽정의 인근에 있는 연지는 우리나라에 백련을 처음 들여와 심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연지는 함벽정과 망모당 사이에 있는 작은 연못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지형에서 망모당과 함벽정에 이르는 구간에는 예전의 아름답던 연지(蓮池)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왕궁천의 중간에 넓은 방죽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망모당의 주인은 문화재로 지정된 것에 대하여 아주 고맙게 생각하는 듯하였다. 이제는 오래되어 병들고 쇠락한 망모당을 어엿한 한옥으로 수리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이 보수하기로 한다면 건물이야 어찌어찌하여 수리를 하겠지만, 주변의 부지를 매입하여 집터를 확보하는 문제와 건물에 어울리는 전체적인 조경작업 등은 힘에 부쳤을 것이다.

 

집주인은 이러한 고마움의 표시로 건물을 잘 관리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자기 조상의 유산을 국가가 나서서 관리해주고 보존해주는데 어느 누군들 싫어할까마는, 그래도 성심을 다하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망모당(望慕堂)’이라는 당액(堂額)은 중국의 유명한 명필인 주지번이 썼다는데, 이것을 탁본으로 조각하여 걸어놓았다. 그리고 원본은 국립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그것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훼손을 미리 방지하고자 하였다고 하니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이 들여다보인다.

한편 이 말을 듣고 보니 익산에도 국립박물관이 생겨서 고대문화도시 익산에서 발굴된 문화재를 전시 보관할 장소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였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진품을 감상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사본을 가지고도 좋아서 글씨체가 어떻고 획이 어떻고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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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2 익산투데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