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이병기선생 생가의 탱자나무(李秉岐先生 生家의 탱자나무)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번지 가람 이병기선생의 생가에 오래된 탱자나무 한 그루가 있다. 면적은 25㎡를 차지하고 있으나, 보통의 탱자나무에 비해 수형이 좋고, 아주 오래된 나무로 인정되어 2002년 1월 4일 시도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생가와 탱자나무는 며느리인 윤옥병씨의 소유이다.
가람 생가의 탱자나무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기록이나 관련된 정확한 내용이 없다. 하지만 이병기선생의 고조부인 김도술이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병암리에서 익산시 여산면 삼수골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고 하며, 1884년 조부인 김조흥에 의해 생가가 건립되었다고 함으로 이를 유추해보면 탱자나무 수령은 약 160~220년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전국에서 보호되고 있는 탱자나무는 총 6그루가 있는데, 그중 1962.12.03 천연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된 강화 갑곶리의 탱자나무와, 1962.12.03 천연기념물 제79호 강화 사기리탱자나무, 1992.09.08 대구시 시도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된 국우동 탱자나무의 수령이 약 400년 정도라고 알려진다. 또 경상북도 시도기념물 제11호 포항보경사의 탱자나무, 경상북도 시도기념물 제135호 문경장수황씨종택의 탱자나무 등도 오래된 나무다.
그런데 가람의 생가에 있는 탱자나무 역시 이들과 비슷한 크기로 높이가 5m, 줄기 둘레가 60cm나 되며, 나뭇가지는 남북으로 4.4m, 동서로 5m에 달해 고조부께서 이사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으로 가정을 할 때, 나무의 수령은 최고 400여 년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탱자나무의 가지는 동쪽에 길게 늘어뜨린 가지가 있는데, 그 길이가 2m도 넘는다. 잎이 떨어진 겨울에 바라보면 그 형상이 잘 나타나며, 모습은 마치 신작리곰솔의 처진 가지를 닮아 조만간 받침대를 설치해주어야 할 것 같다.
원래 탱자나무는 울안에 심지 않는다는 풍설(風說)이 있다. 가지가 얽히고설킨 모습이 마치 뱀을 연상시키며,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는 때문이다. 또 들쥐의 서식처가 되는 환경을 제공하기도 한다. 반면 탱자나무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어 울타리대용으로는 제격이었다.
그렇다면 이병기(1891~1968)선생의 생가에는 울타리용으로 심은 다른 탱자나무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건물을 지을 때 터를 넓히면서 모두 제거하였고, 그 중에서 가장 튼실하고 컸었던 한 그루만 기념으로 남겨두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러면 이 탱자나무는 고조부인 김도술이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심어져있었음을 전제로 할 수도 있다.
탱자나무가 이처럼 온몸에 가시를 달고 있는 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옛날에 자식 다섯을 대리고 사는 홀어머니가 있었다. 남편이 남기고 간 재산이 없어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도 자식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몇 년을 이처럼 악다물고 일하던 어머니도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병에 걸려 누워버렸다. 그런 소문이 나자 어떤 노파가 찾아와서 산 너머 부잣집에 큰딸을 소실로 보내면 논 닷 마지기를 준다는 기별을 넣었다. 큰딸은 이제 겨우 15살 이었다.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노파가 대신 이야기하기로 하였다. 노파의 말을 들은 큰 딸은 하루 낮밤을 운 뒤에 그리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노파에게 논 닷 마지기 대신 그 값에 해당하는 쌀을 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것은 부자한테 하나도 어려울 것 없는 부탁이었다. 쌀을 받은 딸은 길을 떠났고, 그날 밤을 늙은 부자와 보낸 딸은 다음날 저녁 뒤뜰 감나무에 목을 매고 말았다. 그것을 본 부자는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속았다면서 당장 쌀을 찾아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하인들이 부랴부랴 첫째 딸의 본가로 찾아 갔지만 식구들은 이미 간 곳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자는 더욱 길길이 날뛰며 처자의 시체를 묻지 말고 산에 그냥 내버리라고 하였다. 저런 못 된 년은 여우나 늑대에게 뜯어 먹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날 밤 처자와 몰래 사랑을 나누던 총각이 시체를 업어다가 평장(平葬)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찾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무덤에서 연초록 새싹이 자라나는데 차츰 몸에 가시를 달기 시작하였다. 애인은 이때서야 아무도 자신을 범하지 못하도록 날카로운 가시를 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평생동안 결혼하지 않고 산지 사방을 돌아다니며 탱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한편 내가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탱자나무를 비교해보면 가늠하기도 어렵다. 예전에 살던 시골집의 탱자나무는 내가 보아온 것만 해도 50년이 넘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탱자나무는 변함이 없었다. 현재도 굵기가 직경 8cm를 넘지 못하지만, 그때도 내나 지금과 같은 굵기였다. 그렇다면 내가 보기 전 얼마 전에 그런 굵기로 되어있었다는 말인지 해석하기도 어렵다. 직경 20cm에 달하는 생가의 탱자나무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상상조차 힘들다.
탱자나무는 낙엽지는 활엽수로서 관엽식물이며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도 자생한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배수가 잘되는 곳이면 아무데서나 잘 자라며 특히 언덕진 곳이나 밭둑가에서 잘 자란다. 그래서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고 있는데 온화한 지방에서만 자라는 감귤나무의 대목(臺木)으로 심기도 한다. 번식은 잘 익은 씨를 이용하는 방법이 좋으며, 기존에 있던 나무의 밑둥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경우도 있기는 하나 이런 경우 원하는 만큼의 묘목을 얻기가 어렵다.
보통은 키가 3m 정도까지 자라며 줄기와 가지에 커다랗고 뾰족한 가시들이 난다. 예전에 생선가시나 나무가시가 손에 박히면 이 탱자나무가시를 이용하여 빼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나 탱자나무 가시끝의 색깔이 갈색으로 손에 박힌 나무가시의 색과 비슷하여 구별되지 않으니 조심하여야 한다. 탱자나무를 울타리에 심었던 이유는 그만큼 단단하고 뾰쪽한 가시가 있었기에 방어용에 적합하였던 것이다. 잎은 어긋나며 3장의 잔잎으로 이루어진 겹잎이다. 조금 두꺼운 편인 잔잎의 가장자리에는 조그만 톱니들이 났으며, 잎자루 양쪽으로 날개가 달려 있다.
꽃은 지름이 3~5cm로 잎이 나오기 전인 봄에 가지 끝 또는 잎겨드랑이에서 1~2송이씩 하얗게 피어난다. 꽃잎과 꽃받침은 모두 5장이며 수술은 많이 달려있다. 잘 익은 탱자열매는 지름이 3~5cm 정도로 노란색인데 향긋한 냄새가 나서 장식용으로 사용할 정도이지만, 날것으로 먹을 수는 없으며 겉에는 잔털이 많이 나 있다. 덜 익은 열매를 2~3조각으로 잘라 말린 것은 지실(枳實)이라 하여 습진치료제로 사용하고, 열매껍질을 말린 것은 지각(枳殼)이라하며 관장제(寬腸劑)로 사용하기도 한다.
탱자나무가 짐승이나 도둑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면, 탱자는 감기나 오한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그러고 보니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는 의미에서는 참으로 소중한 나무로 여겨진다. 탱자는 원체 향이 강하고 진해서 날로 먹는다거나 혹은 잘 익은 열매라도 생으로 먹기는 고역스럽다. 그러나 그냥 관상용으로 두고 보면 향기가 좋아 잡냄새도 제거해 주며, 귤이나 유자처럼 차를 만들어 마시면 감기예방에 아주 좋은 천연비타민제가 된다.
한편 탱자로 술을 만들어 마시는 사람도 있고 진액을 만들어 약용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진액은 따뜻한 물에 차로 타서 마시면 아토피치료나 피부염치료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탱자술은 지설주라 하여 알레르기에서 생긴 병이나 비염, 피부염, 소화불량, 변비치료 등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탱자나무 줄기는 단단하고 가지가 짧은 것이 특징이다. 거기다가 다른 나무에 비해 더디 크며, 쉽게 굵어지지도 않는 것은 마치 개나리나 철쭉, 싸리나무와도 같다. 팔뚝 굵기의 탱자나무 정도라면 수령이 50년은 족히 되었다고 보아도 틀림없다.
나는 이런 탱자나무로 고무줄 새총을 만들 때 자주 사용하였었다. 잔가지가 많아 Y자 모양을 찾기도 쉬웠고, 우선 손만 뻗으면 구할 수 있는 흔한 나무라서 좋았다. 줄기는 너무 단단한 나머지 자칫하면 쪼개지기 일쑤인데, 가운데에 연필심처럼 나있는 연한부분은 못질하기에도 아주 그만이었다.
거기다가 탱자나무의 여린 잎은 아이의 고사리 손처럼 귀엽기만 하다. 이때는 가시도 연하여 꽃을 감상하는데 부담이 없다. 초록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새하얀 탱자꽃을 보면 배산에 즐비한 때죽나무도 떠오르며, 주걱처럼 갈라진 꽃잎은 마치 박꽃인양 정겹다. 그래서 그런지 봄날 밭둑에서 하얗게 꽃이 핀 탱자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글자 그대로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탱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탱자를 보고 싶었는데, 아차! 하는 사이에 가을이 지나갔고 겨울에야 다시 찾았다. 가람생가의 탱자나무는 잎을 다 떨어뜨렸으나 아직도 몇 개 남은 탱자가 소설속의 마지막 탱자라도 되는 양 나를 반긴다.
축 늘어진 가지는 헤성헤성한 머리를 감추는 가발이라도 되는 양 치부(恥部)를 감싸고 있다. 오래된 나무들은 다 그렇다고 위로를 해보아도 정작 탱자나무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뗀다. 지금까지 쉬었다 간 눈(眼, 雪)들의 무게가 얼마인데, 예고없이 스쳐간 폭풍우(暴風雨, 强占期)의 몸부림은 얼마인데, 나무를 벗삼아 놀다간 별(星, 文人)들이 얼마인데, 무엇보다 지금도 짓누르고 있는 세월(歲月)의 무게가 얼마인데, 내가 보기에도 어깨가 처지고 팔이 늘어나는 것도 그만한 게 다행이었다. 아니면 게을러터진 나를 기다리다가 목이 빠져버렸는지도 모른다.
다른 탱자나무들은 모두 겨우살이준비를 마쳤지만, 생가의 외로운 탱자나무는 아직도 남쪽으로의 겨울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몇 남지 않은 탱자건만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탱자가 달렸다가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참새들이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며 촐랑댄다. 작은 새들은 날카로운 가시사이로 잘도 피해 다니는 재주를 지녔다. 자세히 보니 지난 가을 이파리가 떨어진 자리에는 벌써 내년을 기다리는 성급한 눈망울도 보인다. 아! 이렇게 해서 이병기선생 생가의 탱자나무는 또 한 살을 먹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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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4 익산투데이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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