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목발의노래(益山 木脚의謠)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오룡리 502-6번지 검지마을에 전해오는 익산목발의 노래가 있다. 이는 1973년 6월 30일 시도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익산목발의 노래 전승자로는 1984년 9월 20일에 박갑근옹을 지정하였다. 박옹이 1923년생으로 62세에 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으니,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당시에 후계자를 양성하기에 바쁠 때였다.
이러한 목발의 노래는 주로 초동들이 산에 올라가 벌초할 때 무덤 둘레에서 놀았던 것으로, 민요 춤을 동반한다. 목발의 노래를 부르는 시기는 겨울과 이른 봄에 주로 행해졌다고 한다. 춤을 곁들인 이 지게목발의 노래는 약 60여 년 전만 하더라고 농민들의 예능으로 생활화되었다. 말하자면 농사를 지을 때에 일꾼들의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농사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흥을 돋울 때 불리던 농요의 하나다. 그러던 것이 한국전쟁이후 생활이 향상되면서 머슴과 초동들이 점차 사라지게 되자 이 노래도 같이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로 보면 목발의 노래는 협주곡이 아닌 독주곡으로 지루하고 단순한 느낌을 줄 수도 있는 노래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거창한 악기가 없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하는 도구를 가지고도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 냈다는 것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익산목발의 노래는 풍물에 맞추어 부르는 자진방아타령, 만두레타령, 타작노래, 방아타령이 있고, 자신의 작대기에 맞추어 부르는 산타령, 지게목발의 노래, 작대기 타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노동요로서 지게목발에 맞추어 부르는 농요는 그리 흔치 않으며, 타지방에서는 등짐타령이 있을 정도이나, 이 검지마을에서는 지게를 지고 작대기로 지게를 두드려 가면서 장단을 맞추는 놀이형식을 빌고 있다.
이러한 타령은 대개 메김소리와 받음소리로 구성된 민요인데 이러한 구성을 통하여 노동의 피로를 덜어주고 일의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는데 활용되었다. 이 노래는 박갑근의 노력으로 재현되었으며, 1972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1973년에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1977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른 민요와 다른 점은 노랫가락에 맞추어 풍물로 겹치기 반주를 하는 것이나, 농군들이 몸에 지니고 있는 지게와 작대기를 두드리는 타목(打木)형식의 장단이 뒤따르는 것이다. 이 노래의 발생근원은 파악되지 않으며 금강연안 일대인 전북 익산, 전북 군산과 충남 부여 등지에서 구전되고 있다.
지게목발의 노래는 ‘삼월삼짇날 연자 날아들고’로 시작하는 중중모리 새타령으로부터 ‘사람이 살면 몇 백년이나 사더란 말이냐’로 시작되는 육자배기, ‘어~어어야 어어~어야어어 이이이이 이이이 내로’로 시작하는 자진산타령, ‘바람 불고 눈비 내리는 해변가’의 흥타령, ‘어허허~ 허~ 허~헤~ 에~ 에야’의 등짐소리, 콩꺾자 노래인 목발의 노래, ‘얼씨구나 여보소 농부들 말듣소 아나 초동아 말들어’의 작대기타령, 꿩타령인 둥당기타령, ‘춘하추동 사시절을’로 시작하는 상사소리가 있다. 이외에도 삼기농요 11곡, 일반 부녀자민요 8곡, 만가 6곡 등이 있다.
삼기농요에는 논파는 소리, 농부가, 자진농부가, 진방아타령, 자진방아타령, 만물산야, 질꼬냉이, 벼 베는 산야, 등짐소리, 타작소리, 방아 찧는 소리가 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였던 전수자 박갑근옹이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2001년 사망하자 2005년 6월 12일 문화재지정에서 해제되었다. 박옹이 사망하던 날, 문화계는 작은 파동이 일었다. 우리 가락으로 된 문화재를 계승하지 못한 데에 대한 반성이었다. 물론 어느 한 사람의 잘못으로 치부하기에는 문제가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더욱 더 큰 문제로 지적될 수도 있는 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화계적인 차원에서라도 그런 일을 미리 감지하고 대책을 세워놓았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박옹의 고향인 삼기면 오룡리 검지마을은 이씨와 박씨의 집성촌으로 박옹의 12대조부터 살아왔다고 한다. 슬하에 4남1녀를 두었으나 여식은 출가 후 사망하였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박옹은 바로 학교동창생의 아버님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평상시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고, 언제 한 번 소리를 듣고 녹음을 하면서 진지하게 대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담당자도 시골에 사시는 인간문화재 따로, 객지에 나가 사는 그의 자녀들을 따로 알고 지내면서 둘의 관계가 어떤지 모를 정도였었다. 지금 우리는 먹고 사는 것에 쫓겨 문화를 저만치 밀어내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현재 전해오는 노동요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들은 힘든 일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고 새 힘을 얻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자신의 신세를 적나라하게 노래하면 오히려 더 위축이 되고 맥이 빠질 수도 있는 것이라서, 역으로 해학적인 가사를 넣어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요를 살펴보면 농사를 지을 때 부르던 농업노동요, 길쌈을 매던 길쌈노동요, 밖에서 일하던 토목노동요, 무거운 짐을 옮길 때 부르던 운반노동요, 물고기에 관한 것으로 어업노동요, 쌓고 빻던 제분노동요, 그리고 수공업노동요와 가내노동요가 있다. 농업노동요를 보아도 밭갈이노래, 모내기노래, 김매기노래, 타작노래 등이 있는데, 우리 목발의 노래는 그 보다도 더 세분된 지게로 짐을 지고 나르거나 잠시 쉬면서 부르던 노래다. 길쌈노동요는 길쌈을 하거나 다듬이질처럼 단순반복된 일을 할 때 부르던 노래로 삼 삼는노래, 물레노래, 베틀노래 등이 있다.
해안지방 어부들의 노래로는 ‘뱃노래’가 있으며 서해안에서는 이를 ‘배따라기’라 불렀다. 이로는 작업의 종류에 따라 불렸던 연평도의 뱃치기, 안면도의 봉기타령, 위도의 띄뱃놀이, 거문도의 거문도뱃노래 등이 전해온다.
고전의 노동요가 자급자족하던 촌락공동체의 산물이라면 상공업시대로 들어선 지금은 신노동요가 탄생하게 된다. 경기도의 ‘긴방아타령’이 그 예이나 일반적으로는 특정한 노래를 지어 부르기보다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음악을 듣고 따라 부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지금은 지역적 혹은 직업적 구분이 심하지 않아 인적교류가 활발히 일어나며, 직업간 이동현상도 빈번하여 별도의 노동요가 자리를 잡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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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10.07.21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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