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번지에 있는 불교사찰지로 일부 국유지와 사유지가 섞여있는 13,384,699㎡의 폐사지이다. 여기에 따른 주요 유적건조물은 미륵사지석탑이 하나 있으며, 2기의 당간지주와 2기의 석등하대석이 남아있는 정도이다. 물론 수도 없이 많은 주춧돌과 기단석축들은 훼손된 채로 미륵사지 전체에 산재해 있다. 1966년 6월 22일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사지는 백제 때의 커다란 절터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배치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석탑이 있었고, 중간에는 목탑이 있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형식의 회랑(回廊)으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1975년 원광대학교의 발굴조사에서 그 규모가 밝혀지고 절터의 중요성이 드러나자 198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하기 시작하여 현재도 조사 중이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 토기, 금속, 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전용하고 있다.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모형이 있고,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은 20,000여 점에 달한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護國寺刹)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미륵사의 창건설화는 ‘삼국유사’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고, 그 후의 조선시대 문헌 몇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武王條)’에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현출하여 왕비의 청에 따라 이곳을 메우고 3개의 법당과 3개의 탑 그리고 회랑 등을 세워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조탑가람방식은 일본으로 전교(傳敎)되어 아스카시대(飛鳥時代) 가람 건축양식의 원류가 되었다.
그런데 주기에 의하면 이 절 이름을 국사(國史)에는 왕흥사(王興寺)라고도 했다고 한다. 또 ‘조선불교 총서(朝鮮佛敎 叢書)’에 실린 고려 초 승려 혜거국사비문(惠居國師碑文)에 의하면 922년 후백제 견훤(甄萱) 때에 미륵사의 탑을 고쳐 세웠다는 기사가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성덕왕 18년 719년조 9월에 미륵사에 지진이 있었다고 하였다. 발견된 ‘대중12년’명문 토기와 ‘미륵사’명문 토기로 보아 신라47대 헌안왕 2년 858년에도 미륵사가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미륵사가 벼락을 맞았다고 하였는데, 이런 것을 종합해보면 조금 더 늦게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영조 때 강후진(康侯晋)이 지은 ‘와유록(臥遊錄)’에서도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전자에서는 ‘석탑이 극대하여 그 높이가 수십 척으로 동방석탑 중 제일이다.’하였고, 후자에서는 ‘밭둑 사이에 7층 석탑이 있는데 대단히 높고 크며… 세상에서 이르기를 동방석탑에서 제일이란 말이 거짓이 아니다. 백 년 전 벼락으로 인하여 그 반이 허물어졌고, … 밭둑 사이에 초석과 석조가 널리 있는데, 그 반이 노출되거나 전체가 노출되었고… 종각의 초석으로 보이는 것이 완연히 남아 있다.…’ 라고 하여 이때 이미 사찰이 폐허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미륵사는 백제 무왕 대에 창건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부터 1995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 주도하에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었다.
미륵사는 사자사(獅子寺)가 있는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좌청룡 우백호의 좌우능선을 두고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조사유구를 통해본 미륵사 원래의 가람은 남북자오선상(南北子午線上)의 서쪽으로 약 23° 기운, 중앙축선을 기준으로 남쪽에서부터 중문(中門), 탑(木塔)), 금당(金堂)을 배열한 중원(中院)과, 이를 완전히 둘러싼 회랑이 있다. 또 중원 양옆에는 중원의 남북축선과 평행하고 중원의 각 건물과 같은 횡축열선상(橫軸列線上)에 놓인 중문, 탑, 금당을 배치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을 대칭으로 놓은 것이다.
동·서원의 외곽 회랑터는 중원의 동·서 회랑터에 대응하는 위치에 남북 길이가 전자의 것보다 약간 짧게 북쪽으로 뻗다가 내곽 쪽으로 꺾여 금당터 북쪽에서 폭넓게 북으로 뻗은 동·서 승방터에 연결되고, 이 승방터의 북단에서 가람 중심축에 놓이는 강당터 좌우측과 연결되는 북회랑터와도 연결된다. 그러므로 중원 북회랑터 북쪽에는 중원 남북 중심축선상에 거대한 강당터가 놓이게 된다.
건물의 배치는 거의 평지상에 하였는데 남쪽의 중문과 연결되는 남회랑터 앞과 강당터 북쪽에 동서로 길게 놓인 북승방터 앞에 석축으로 이루어진 축단을 두고 있다. 즉 미륵사의 가람은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의 가람으로 동원, 서원 및 중원으로 구획되어 있다. 각 원(院)에서는 중문과 탑, 금당을 1동씩 두어 소위 일탑식 가람을 동서 축선상에 나란히 배치하고, 강당은 중원 북쪽에 하나만 두고 있다.
또 중원에는 목탑을 두고, 동·서원에는 석탑을 두어 3금당 3탑식을 이룬 것도 창건연기에 관한 삼국유사의 '…당(堂), 탑(塔), 랑(廊), 무(廡), 삼소창지(三所創之) …'란 기록과 일치하며, 우리나라 고대가람으로서는 특이하다.
그리고 이 중심 절터 외에 서편에는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 건물터가 있고, 북편에는 조선시대의 가람터가 확인됨으로써 백제 이후 계속된 미륵사의 변천모습과 하한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역(寺域) 남측에는 거대한 연못이 있었는데 여기에 산 흙을 가져다 메워 터를 닦은 것임이 밝혀졌다. 그 공사의 규모와 조성방법 또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각 원의 금당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중원의 금당이 동·서원의 금당보다 규모면에서 조금 크다. 특히 금당은 바닥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높이 1m 정도의 주춧돌을 마름모꼴로 놓았으며, 초석 위는 귀틀목을 걸친 흔적이 있어 금당 바닥에 빈 공간을 만들어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 같다.
미륵사지 전체에 있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건물지에서 온돌시설이 조사됨으로써 온돌의 발전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토된 유물은 기와와 토기가 주류를 이루나 금속, 목재, 석재, 유리 등 다양하다. 기와는 백제 기와로부터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까지 다양하게 출토되었으며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창건시기인 백제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인근에 공방지를 두어 조달하였을 것으로 알려졌다. 종류는 수막새, 암막새, 평기와와 서까래 끝에 붙이는 녹유연화문연목와(錄釉蓮花文椽木瓦),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치미(鴟尾) 등이며 '미륵사(彌勒寺)', '금마저관(金馬渚官)', '묘봉원(妙奉院)', '연우사년(延祐四年)', '만력십오년(萬曆十五年)' 등의 문자를 새긴 기와도 전 기간에 걸쳐 다양하게 수습되었다. 사역에서 출토된 '만력십오년(萬曆十五年)(1587)'과 '만력십칠년(萬曆十七年)(1589)' 명(銘) 기와가 있으나 그 이후에 해당하는 유물은 발견되지 않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절이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미륵사지 내에는 이들 건물지와 함께 서쪽 금당지 앞에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석탑 1기가 일부 파손된 채 남아 있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탑 중 건립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원 석탑터 주변에서 출토된 부재로 동원 석탑의 복원 안(案)을 연구한 결과 9층임이 밝혀져, 1993년 동탑을 복원하였다. 목탑 역시 복원 안이 마련되어 1997년 개관된 전시관에 그 모형을 보여주고 있다.
동·서원의 남회랑 앞에는 당간지주가 각 한 기씩 모두 2기가 있는데, 이중 서쪽의 것은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당간지주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석당간(石幢竿)이었음이 밝혀졌다.
한편 무왕은 왜 미륵사와 같은 커다란 사찰을 건립하고, 왕궁에 천도를 하거나 별도를 둘 정도로 익산에 공을 들였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당시 백제의 상황을 보면 선대(先代)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침략 등에 많은 국력을 소비하였으며, 선왕인 위덕왕의 경우 정치적 입지가 아주 좁았던 상황이었다.
위덕왕 다음에 바로 창왕이나 법왕이 뒤를 이엇으나 각각 2년으로 단명하였고, 왕권은 일개 토후세력의 권력과도 같을 정도가 되었다. 그것은 위덕왕의 선대인 성왕의 무덤에 사용되었던 부재들의 재질이 열악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이때 권력은 있으나 왕권을 차지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였던 지방토후들은, 어느 정도 법통을 갖춘 서동을 옹위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설에 서자(庶子)라는 무왕(武王) 역시 수도가 아닌 변방에 숨어살다가 자신의 힘으로 즉위하기보다는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부합된 결과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
그 뒤 익산의 토후(土侯)들은 무왕을 내세워 익산 천도설 또는 별도설을 계획하면서, 거기에 필요한 조건을 해결해 나갔을 것이다. 2009년 1월 14일 석탑의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기는 미륵사 건립에 소요된 비용을 제공한 사람이 왕비로서 유력토후인 좌평(佐平)으로 사택적덕(沙宅積德) 가문의 따님이었다는 것을 적고 있는데, 이런 것이 그 중 한 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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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10.07.28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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