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85. 금강변의 입점리고분

꿈꾸는 세상살이 2011. 7. 15. 09:06

입점리고분(笠店里古墳)

3000년 세월의 흔적 익산의 문화재를 찾아서(86)

한호철 칼럼니스트, h2cheol@yahoo.co.kr

 

 
▲ 입점리고분 
2차례에 걸쳐 총 21기의 무덤을 조사할 당시의 사진이다. 조사 후에 다시 복원하였기에 주요 고분에 대해서는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

웅포면 입점리 산174번지 일대의 시소유지 18,502m²에서 고대 유적인 고분이 다수 발견되어, 1991년 2월 26일 사적 제347호로 지정되었다. 고분(古墳)은 1986년 2월 최초로 발견되어 1호분에서 8호분까지 확인되었다. 위치는 황등에서 웅포로 이어지는 지방도의 중간지점인 새터마을 뒷산에 있다.
입점리고분전시관의 인근에 어래산성과 도청산성이 남북으로 가까운 거리에 마주하여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고대에는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8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8기의 고분을 조사하였고, 1998년에는 사적 제374호로 지정된 지역에 대한 정비를 위한 조사에서 다시 13기의 고분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발굴조사에서는 총 21기 중에서 19기에 대해서만 상세 조사하였다. 이중 가장 양호한 상태로 발굴된 고분은 98-1호분으로 수혈식석곽묘로 분류된다. 이 고분에서는 유일하게 배수로를 설치하였고, 할석을 다듬어 네 벽을 구축하였는데 석실은 길이 3.24m, 너비 1.44m, 높이 1.3m 내외이다. 다른 고분에서는 적은 양의 유물이 나왔거나 아예 나오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입점리 고분에서는 금동제(金銅製) 관모(冠帽), 금제신, 금제장신구, 중국청자 등이 수습되어, 5세기 중엽의 백제토착세력과 중앙세력과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또 다른 유물로는 말재갈, 철제 발걸이, 토기, 청자항아리, 화살통 장식, 금귀걸이, 유리구슬 등이 나왔다. 또 관모 내관(內冠)의 형태는 가야와 신라지역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인데, 일본 구마모토현의 ‘애다후나야마’고분 출토품과 같은 국자형 뒷머리 장식을 가지고 있었다. 관모의 외관(外冠)은 나뭇가지형 입식(立蝕)과 보요(步搖)가 장식되었다.

특히 금동제 관모가 발견된 1호 무덤은 널길(羨道)과 널방(羨室)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으로, 천장은 네 벽을 맞추어 쌓아올리면서 마지막 넉 장의 뚜껑돌을 덮어 만든 소위 궁륭상천장을 이루었다. 특히 1호 무덤에서 나온 고깔모양의 금동제관모는 나주 반남(潘南)고분 이후 처음이며, 일본 웅본현 국수정에 보관돼 있는 선산(船山)고분 출토품과 유사하여, 당시 백제와 일본간의 문화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유물들을 보아 5세기경 이 지역의 지배층과 관련되는 무덤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출토된 100여점의 유물을 모아 입점리고분전시관을 세웠다.

여기에서 들판하나 건너에는 웅포리구분도 있다. 이곳에서도 비슷한 시기로 추정되는 무덤이 30기나 조사되었다. 강과 산이 어우러진 웅포는 그만큼 생활하기에 적합하였던 곳임이 증명되는 대목이다.

고분전시관에서는 고분의 구조와 양식, 고분의 연포나 분포도, 지도나 모형 등을 볼 수 있고, 동영상으로 이해를 돕고 있다. 일부는 발견유물도 전시되어 있으며, 금동관테, 금동신발이나 금동관모는 문화재의 가치가 높아 전주국립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1986년과 1998년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하였지만 여기서 발견된 유물에 대해 어떤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물의 형태나 재료에 의하면 당시 최상류층의 유물이거나, 인근 지명과 성곽의 유래를 감안하면 왕이 사용하였던 유물임이 확인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우리지역의 지도자들이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지역적인 세력의 약화로 발언권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발견된 고분에 비해 유물은 적은 편이지만 일정한 곳에서 21기가 무더기로 발견된 것도 드문 예이다. 고분군은 고분전시관의 바로 위쪽 야산 가파른 경사면에 모여 있다. 크고 작은 무덤들이 각기 자기를 보아달라는 듯이 늘어서있다. 당시에 이런 무덤을 남겼을 정도라면 지배층이거나 상류귀족측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귀족이 모여 살았던 곳은 역시 한 부족의 중심지였거나 국가의 수도였음도 분명해진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흔적만 있을뿐 주인은 온데간데 없다. 우리가 죽으면 한줌 흙이 될 터인데 아웅다웅 다투며 살 일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입점리고분은 해발 90m~120m 사이에서 분포되었으며 유형은 구덩식돌곽무덤인 수혈식석곽묘가 11기, 앞트기식돌곽무덤인 횡구식석곽묘가 2기, 굴식돌방무덤인 횡혈식석실분이 7기, 독무덤인 옹관묘가 1기로 여러 유형의 고분이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근의 웅포리고분과 유사한데, 이들 고분간의 관계는 백제 지방묘제인 구덩식돌곽무덤이 중앙묘제인 굴식돌방무덤의 영향을 받아 앞트기식 돌곽무덤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이러한 횡혈식석실은 공주 송산리 5호분과 같은 것이며 금강 이남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었다.

예전의 익산은 감해국, 건마국, 여래비리국, 아림국, 불사분야국 등이 있었으며 마한의 중심지역 이었다. 이중에서도 건마국은 세력이 왕성하여 모두에게 경계의 대상이었던 곳이다. 이렇게 튼실했던 건마국이 4세기 초 백제에 병합됨으로써 건마국의 세력가들은 하나같이 백제의 중앙귀족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익산지역이 백제의 중앙 세력권내로 흡수 편제되었다고 보이며, 입점리고분은 백제사뿐만 아니라 익산지역의 고대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판단된다. 입점리고분이 있는 맞은 편 산에는 어래산성도 있다. 이름 그대로 임금이 왔다는 산이며 그런 곳의 산성이라는 뜻이다.

현재 어래산성을 마주하는 입점리고분은 외곽지고 한적한 시골길의 산비탈에 있다. 일부러 가지 않으면 방문조차 힘든 곳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고, 금강변에서 오는 적을 물리치는 등 조망도 쉬운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세월의 격세지감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