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향교 은행나무(益山鄕校 銀杏木) | |
3000년 세월의 흔적 익산의 문화재를 찾아서 | |
금마면 동고도리 389-1번지에 익산향교가 있고, 그 경내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익산향교의 소유로 2001년 12월 27일 시도기념물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은행나무는 고생대 말기에 나타나서 중생대 중반에 걸쳐서 전성하였으며, 은행나무목은 은행나무과로만 이루어져 현재까지도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단일종이다. 은행나무는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절의 뜰에 심어왔으며, 곰팡이와 벌레에 강하여 아름다운 관상수로 취급되고 있다. 일반적인 겉씨식물과는 달리 대기 오염에도 강하여 도심의 가로수로 제격이며, 잎과 열매는 약제로도 활용되는 식물이다. 은행나무는 자란지 20여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으며, 특유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암나무를 정원에 심는 것은 고려하여야 한다. 반면에 목재는 엷은 색깔이며 가볍고 약하여 경제적 가치는 적지만 가벼운 소품제작에 사용되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원줄기를 기둥으로 하여 곧게 자라며 오래된 나무는 키 30m, 지름 2.5m에 달하기도 한다. 은행나무꽃은 봄에 피는데 잎이 조금 자랐을 때 피기 때문에 언뜻 신경을 쓰지 못하면 볼 수가 없다. 게다가 다른 꽃과 달리 화려하지도 않아 눈에 쉽게 띄지도 않는다. 꽃은 15년 이상 자란 나무에서만 피는데 흔히 말하는 꽃은 수꽃이며 암나무의 꽃은 그나마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것도 말이 좋아 15년이지 생육이 늦은 나무는 30년이 되어야 꽃이 필 정도이다. 수꽃은 그냥 총체모양으로 피지만 암꽃은 마치 야구글러브모양으로 넓적하고 오목한 형태로 핀다. 암수나무가 따로 있는데다가 꿀이나 꽃향이 없어 벌이나 나비에 의해 수분이 이루어지지 않고 바람에 의하므로 풍매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통은 하늘을 향해 죽죽 뻗은 나무가 수나무이고, 옆으로 굵은 가지를 내면서 자란 나무가 암나무이다. 또 할아버지가 공을 들이고 손자가 수확을 한다는 의미로 공손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요즘 공해로 찌든 도심 속의 가로수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늦가을 포도를 노란 잎으로 덮을 때는 우리의 마음을 순화시켜 낭만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우리시에서도 일정기간 동안은 은행잎을 치우지 않아 운치를 제공하는 거리가 있을 정도다. 은행나무는 공자의 인품을 거론할 때 자주 등장한다. 원래 행단은 장자(莊子) 어부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치유(緇惟)의 숲에서 은행나무로 만든 단(壇)에 앉아 쉴 때, 제자들은 독서를 하고 공자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였다’는 기록에서 출발한다. 이후 공자가 유명하여지자 학문의 격이 높고 클 때 공자를 연상하며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때 행단고슬(壇杏鼓瑟)이라는 4자성어가 생겨났다. 따라서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향교와 넋을 기리는 서원에서 은행나무를 심어 그의 인품과 사상을 기리게 되었다. 이렇게 심어진 은행나무는 눈에 보이는 나무는 분명하였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유교의 상징이 되면서 공자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향교와 서원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익산향교는 조선 태조 7년 1398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향교의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로 향교의 역사와 같은 수령 500∼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15∼16m이고 지상 8m에서 4개의 가지가 나뉘어져 있다. 줄기의 일부가 절단된 점을 감안할 때, 나무는 현 상태보다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무의 흉고 둘레와 나뭇가지의 규모를 고려하더라도 이러한 추정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익산향교 은행나무는 나무의 수령이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향교의 상징인 행단(杏亶)의 의미가 포함된 전통문화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평상시 익산향교의 외삼문은 굳게 닫혀있고, 관리인조차도 그 옆에 있는 주택을 통하여 출입하고 있다. 익산향교는 대문 앞에 넓은 공간을 두었고, 선정비와 불망비를 여러 개 가지고 있다. 또한 여러 채의 건물을 안고 있으며, 바로 옆에는 개인주택이 있어 담장을 통과하는 쪽문을 냈다. 담장은 축대위에 쌓아 쉽게 넘겨다볼 수 없으나, 커다란 은행나무는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고개를 내밀고 대답을 한다. 어쩌면 마을 어귀에서부터 향교를 찾는 이를 알아보고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오래된 노거수의 예지능력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소리만 들어도 자란다더니, 향교의 은행나무는 글읽는 소리를 듣고 자랐을 법하다. 글읽기가 멈춘 지금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쇠약해진 몸을 겨우 지탱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굳게 닫힌 향교의 외삼문이 활짝 열리는 날, 그날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지는 날일 것이다.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는 아이들, 마당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 대청에 앉아 글을 쓰는 아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은행나무도 생기를 얻고 힘을 낼 것이다. 내가 방문하면 개짖는 소리보다 은행잎 단풍드는 소리가 먼저 들리는 향교라야 생기가 감돌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하는 은행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휴식처를 제공하는 정자나무로, 멀리 길 떠난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버텨온 산 증인이다. 이들은 각종 기념물이나 마을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 중에 은행나무는 모두 21수가 지정되었다. 내용을 보면 천연기념물 제30호 용문사의 은행나무, 59호 서울문묘의 은행나무, 64호 두서면의 은행나무, 76호 영월의 은행나무, 84호 금산 행정의 은행나무, 165호 읍내리의 은행나무, 166호 주문진 장덕리의 은행나무, 167호 원주 반계리의 은행나무, 175호 용계의 은행나무, 223호 영동 영국사의 은행나무, 225호 선산 농소의 은행나무, 300호 금릉 대덕면의 은행나무, 301호 청도 이서면의 은행나무, 302호 의령 유곡면의 은행나무, 303호 화순 이서면의 은행나무, 304호 강화 서도면의 은행나무, 320호 부여 내산면의 은행나무, 365호 금산 보석사의 은행나무, 385호 강진 병영면의 은행나무, 402호 청도 적천사의 은행나무, 406호 함양 운곡리의 은행나무 등이다. 향교의 상징이 은행나무라고 하기는 하지만 이 자료에서 보듯이 향교의 은행나무보다는 모두가 사찰이나 마을의 보호수들이 천연기념물에 지정되었다. 이것은 다른 곳은 자연발생적인데 반해 향교는 인위적인 식수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향교는 설립연도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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