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이렇다 할 산과 강이 없어도 성장하는 도시, 익산!

꿈꾸는 세상살이 2013. 11. 12. 10:05

이렇다 할 산과 강이 없어도 성장하는 도시, 익산!

 

예로부터 한 도시가 발전하려면 높은 산과 그에 어울리는 강을 끼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번창했던 도시들은 산으로 둘러싸여 요새를 이루며, 풍부한 물이 있어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 및 산업용으로 사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비근한 예로 전주를 보더라도 치명자산을 비롯하여 건지산, 완산칠봉, 그리고 고덕산 등 아주 높지는 않더라도 한 고을을 감싸기에 충분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전주천이 도심 한 가운데를 흘러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멀리 보더라도 청주의 무심천, 대전의 갑천과 유등천, 울산의 태화강, 서울의 한강, 광주의 영산강과 광주천, 원주의 원주천 등 바닷가가 아닌 내륙의 경우에도 크고 작은 하천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익산은 내세울 만한 강이나 산이 없는 평야지대의 도시로 성장하였을까. 하지만 익산이 처음부터 산이나 강이 없었던 도시는 아니었다.

익산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에 형성된 자연발생적 도시였다는 것은 이미 밝힌바와 같다. 그 당시는 청동기 및 석기시대로 이렇다 할 기록이나 문화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당시의 유물들에 의해 유추 해석할 수는 있는 정도다.

거슬러 올라가면 초기 익산은 미륵산을 중심으로 하는 여산, 금마와 왕궁지역, 함라산을 중심으로 하는 함라, 웅포지역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들 지역은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산을 끼고 있었으며, 금강이나 기타 작은 하천을 중심으로 하던 수렵생활에 편리한 곳이었다는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의 익산은 금강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 익산의 북부권역과 동부권역이 대세였다는 결론이 선다. 그때만 해도 익산에는 풍부한 물과 아담한 산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현재의 익산은 높은 산이 없고 깊은 물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이것 역시 따지고 보면 원래의 태생지를 벗어나더니 자기가 편리한 대로 정착한 곳에서 물이나 산이 없다는 얘기를 하는 불평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양보를 하더라도 익산이 물이 없는 곳이 아님은 확실하다. 현재도 만경강이라는 하천이 도도히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 강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며 생활하수의 종착지로 활용하고 있다. 이 물을 식수로 활용할 수가 없다는 것은 수질상의 문제이니 별개로 취급하여야 한다. 어떤 이는 이런 만경강을 두고도 익산 시내의 중심을 통과하지 않고 옆으로 비껴가기 때문에 익산의 주요 하천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익산의 중심을 흐르는 하천은 정말 없는 것일까. 우선 대답을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이다. 익산시청이 있는 번화가와 북부권 혹은 동부권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하천이 있으니 바로 탑천인 것이다. 이 탑천은 익산의 작은 고을인 황등을 흘러가다가 없어지는 미미한 하천이 아니다. 엄연히 탑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금마에서부터 삼기, 황등을 지나 만경강으로 이어지는 지방소하천인 것이다.

이 외에도 예전의 익산은 물이 풍부하였던 곳임을 증명하는 것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그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하고 확실한 것은 지명이라 할 수 있다. 지명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람의 기분에 의해 뚝딱 지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다 하여도 민가에서 전해오는 별칭은 이면에 담긴 여러 의미를 말해주기도 한다. 차제에 익산에서 물에 관한 지명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시내에서는 배산을 들 수 있다. 배산은 한글학적 의미에서 볼 때 술잔을 엎어놓은 것과 같다하여 배산(杯山)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잔을 엎어놓은 형상은 주위에 잔잔한 물이 가득한데 우뚝 솟은 산이 하나 있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옛 배산의 주위는 온통 물바다 혹은 낮은 저지대였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다가포이다. 이런 다가포(多佳浦)는 원래 다가천에서 비롯된 말이다.

익산구지에 의하면 다가천은 하나의 우물인데 수량이 풍부하여 천만 가정이 식수로 활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 인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의 천만 가정은 아주 많음을 뜻한다. 이런 물이 우물을 차고 넘치면 하나의 내를 이루고 강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좀 더 비약적인 해석을 하면 아마 배도 드나들었을 법한 곳이다.

모현동의 항가메 뒤에 있는 섬다리(島橋)역시 이와 비슷한 형상인데, 만경강 둑이 완성되기 전에 불린 이름으로 마치 넓은 개펄에서 갈대가 우거진 섬과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

목천동의 목천포(木川浦)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 지역에 속한다. 만경강을 따라 올라오던 배가 목천포에서 육지와 연결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풍천장어가 유명하였으며, 한 때는 익산의 대표 음식으로 꼽혔으나 이제는 그런 시절을 잊은지 오래다. 풍천장어는 원래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자란 장어를 일컫는 말임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현재 남아있는 목천포의 상징은 목천포 수문과 풍천장어를 들 수 있다.

만경강(萬頃江)은 예전에 사수(泗水)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청천강이 살수(薩水), 대동강이 열수(列水, 浿水), 한강이 한수(漢水)였던 것과 같은 이치다 .

조금 상류인 춘포는 어떤가. 삼포리(三浦里)는 삼면(三面)이 온통 갯벌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신동리라는 이름은 아무리 가물어도 여기저기서 물이 솟아나와 마음 놓고 모내기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의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춘포(春浦)는 그 윗 지역인 삼례와 봉동까지 배가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아 수로교통이 편리한 중간 포구에 속했다. 강점기에는 군산항까지 뱃길을 이용한 쌀의 수탈이 이루어졌던 시작점이었다. 그러다가 좀 더 편리하면서 대량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육상의 신작로와 철도를 부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훗날 전주에서 익산을 경유하여 군산을 잇는 전국 최초의 4차선 포장도로인 번영로로 기록된다. 만경강 주변에는 이밖에도 고사포, 동자포, 신창진, 회포, 율포, 사천진, 양정포 등이 있었다.

황등호는 임익수리조합이 설립된 후 1935년 완주군 경천면의 경천저수지가 완공되면서 그 용도를 다하게 되었다.

황등호는 그때까지 농업용수의 본류답게 아주 거대한 면적에 풍부한 수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의 미륵사지를 좌우로 하여 형성된 두 개의 물줄기가 각각 삼기면과 금마면을 거쳐 황등호로 모아졌다. 지금 그 흔적을 보면 드넓던 황등호의 중앙부는 모두 메워진 상태이며, 당시 주변으로 수로만 남겨놓은 형상이 되었다. 따라서 옛 황등호의 물줄기는 두 길이 요교에서 하나로 모여 탑천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탑천(塔川)의 탑은 미륵사지의 석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탑천이 흘러가는 대야면 죽산리 탑동마을의 3층석탑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면, 당시 황등호의 위쪽에 물은 있으나 커다란 천이 형성되지 못하였기에 탑천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탑호라는 이름을 붙였었더라면 이해가 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황등호의 아래에서 제법 도도해진 물줄기가 대야면을 지날 때에 탑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여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배산의 남서쪽에 위치한 오산면 오산천의 경우에도 해수유통을 찾아볼 수 있다. 오산천의 상류인 원오산까지 젓갈이나 젓갈의 원료를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는 말이 있으며, 이것은 단옷날이 되면 춘포면 만경강가에서 해수 모래찜을 하였던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오산리의 신중마을은 섬안상으로 불리는 곳이다. 섬안상은 글자 그대로 섬의 안쪽마을이며, 산에 붙어 있다고 하는 산엣마을의 합성어이다. 이곳은 해일이 일거나 사리처럼 바닷물이 넘쳐나는 시기에는 조수가 올라와 패농하는 것이 다반사였던 곳이다. 남전리의 남참마을과 북참마을 역시 섬안상처럼 물이 차 올라왔다는 이름을 가진 곳들이다.

이렇게 보면 배산을 중심에 놓고 목천포와 모현동, 만석동, 황등, 그리고 인근에 있는 대야면의 탑동까지 모두 배가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조금만 큰물이 져도 퇴적물이 쌓이거나 강물이 범람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이런 곳까지 배가 들어왔었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는 수로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관개시설이 잘 정비되어있고, 선박기술이 더 발달한 시절에는 어찌하여 배가 드나들지 못하는 것일까? 배가 크고 무거워서일까? 아니면 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 무거워서 가라앉기 때문일까?

그 대답은 쉽지가 않다. 우선 농업이 발달하여 많은 물을 소모하기 때문에 하천의 수량이 부족한 때문도 있을 것이요,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로 거의 모든 지표면의 물이 땅속에 스며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도로를 비롯하여 집안의 마당까지도 포장을 하는 바람에 땅으로 스며드는 물이 많아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며, 지하수를 개발하여 쓰는 양에 비례하여 버려지는 생활하수가 역시 많아 졌으니 용수로 인한 원인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강수량 탓도 아니니 속단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굳이 이유를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산업화에 따른 자연과 인간의 부조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황등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도선이다. 도선(渡船)은 배가 드나드는 곳이라는 뜻으로, 지역말로 뱃나드리 혹은 뱃나달이로 통한다. 도한 백길은 원래 뱃길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예전에 배가 드나들던 길이라는 뜻이다. 이런 뱃길은 뭍에 생기는 호수를 건너는 뱃길이라기보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포구로서의 뱃길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도촌도 무시할 수 없는 지명이다. 도촌(島村)은 섬말로 통하는데, 섬말이란 섬마을에서 비롯된 것임은 누구나 짐작할 만하다. 따라서 바닷물이 만경강을 따라 목천포를 거친 후 다가포에서 올라왔을 수도 있고, 만경강에서 탑천을 거쳐 마포교쪽을 거친 후 도촌으로 올라왔을 수도 있다.

황등면 죽촌리의 화농마을도 그런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화농은 섬말 옆에 있는 지역이며 한자로 화농(禾農)이라 하여 벼농사마을로 통하지만, 인근에서는 수렁고지 혹은 수렁골로 통한다. 이는 논에 물이 많아 발이 빠지는 곳을 뜻하며, 한두 논이 아니라 화농마을 전체가 물이 많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한두 논에 물이 많아 빠지는 경우는 다른 논과 다르니 그 논에서 일할 때는 주의하라는 뜻에서 특별히 수렁배미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 나오는 섬말은 그냥 보통의 섬마을이 아니다. 왕궁면에 백제의 천도를 꿈꾸었던 무왕은 부여에서 성당포, 함열, 황등의 섬말과 도선을 거처 금마의 용순리에 닿는 물길을 구상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수로교통의 요지였던 셈이다. 이때 벌써 황등호가 축조되어 있었다면 황등호에서 배를 갈아타고 갔을 것이며, 아직 축조 전이었다면 타고 온 배를 이용하여 왕궁까지 계속 올라갔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떤 개인의 주장에 지나지 않지만 가정은 해볼 수 있는 코스다.

이에 반하여 일부 학자는 부여에서 출발한 배가 서해로 들었다가 군산을 거쳐 회현과 대야를 지난 후 탑천을 통하여 황등호에 닿았을 것이며, 다시 왕궁평성으로 올라갔을 것이라는 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두 안 중 어느 것이 맞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둘 다 황등의 한 지역이었던 도선을 수로의 요지로 인정하는 내용이며, 뱃길로 왕궁평성까지 가능하였다는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최근 발굴된 왕궁리 왕궁평성의 성벽 외부 관개수로에서 추정할 수 있는 상황이다. 물론 아직까지 구체적인 경로를 완벽하게 밝히지는 못했지만, 검토해 보아야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황등호는 황등제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삼국시대에 보를 쌓아 만든 호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보의 길이는 900보(步)요, 호의 둘레는 25리(里) 즉 10km에 속한다고 하였다. 이 10km를 대략 표시하면 황등의 청금산과 신용동의 도치산, 그리고 부송동과 임상동, 삼기면을 잇는 거리로 나타난다. 당시 일대 저지대가 모두 황등호 속에 잠기는 아주 큰 호수였다는 얘기가 된다. 얼마나 큰 호수였으면 황등제의 이남은 호남이라 하며 서쪽은 호서라고 하였을까 짐작하게 한다.

문헌비고는 우리나라 상고(上古) 때부터 대한 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문물과 제도를 총망라하여 정리한 책이다. 융희 2년 1908년에 박용대, 조승구 등 30여 명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증보 편집하여 250권 50책으로 엮어냈다.

또 균전제(均田制)를 중심으로 하는 토지개혁안이 담겨있는 『반계수록』에서 황등제는 고부의 눌제, 김제의 벽골제와 더불어 나라 안에서도 큰 제에 속한다고 하였다. 또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황등제가 등장하며,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표기될 정도로 큰 저수지로 통한다.

한편, 강점기 임익수리조합은 1909년 황등제를 보완하는 제방을 쌓기 시작하여 1914년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이 말은 강점기 임익수리조합이 생기기 오래 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증명하는 내용들이다.

덧붙이자면 반계수록(磻溪隧錄)은 조선 효종3년 1652년에 시작하여 1670년에 편찬된 국가운영 기본제안서로 호가 반계인 유형원이 펴낸 대작이다.

약 60년 전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황등호 아래 탑천변에서 연탄도 아닌 그러나 흙도 아닌 땔감이 나왔다. 지금으로 보면 황등과 배산 및 신용동을 연결해주는 내곳리의 일대가 모두 그런 곳이었다. 이는 화력이 너무 낮아 토탄(土炭)으로 불렸는데,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는 삽으로 토탄을 파다 말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토탄은 식물의 퇴적물이 개펄에 혼합된 것으로, 과거에 큰물이 흘러 초목을 휩쓸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산면의 장신리 숯구데기도 여러 곳에서 토탄이 나와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금강변에 있는 지역들은 비교적 개발이 덜 된 상태로써 그 명칭의 유래를 확인하기가 쉽다. 국가에 세금을 내던 조세(租稅)를 거둬들여 쌓아두던 창고와 이를 배에 실어 서울로 보내던 곳 중의 하나가 성당이다. 이것을 조창(租倉) 및 조운(漕運)이라 하는데, 성당면의 성당포구 줄여서 성포가 그런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그러므로 급류가 아닌 뱃길이 뚫려있었고, 배를 이용한 교통이 편리하였었다는 말이 된다.

이와 유사하게 성당면 와초리에 간지평(艮之坪)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는 바닷물이 들어와서 물의 간이 짜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금강하구둑이 막히기 전에는 바닷물의 유입이 원활하였으며, 이를 통한 수로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증명이다. 이런 해수유통 즉 풍천의 증거로는 웅포와 성당에서 잡히던 위어가 해수가 막힌 요즘에는 잡히지 않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더불어 갈산리의 수산(水山)은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잦은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모두가 해수면과 같은 정도의 물이 많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웅포면을 보자. 웅포는 그 이름부터가 포구로서 금강변에 위치하여 바다와의 내왕이 빈번한 곳이었음을 말해준다. 금강은 굽이쳐 흐르는 물이 비단결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므로, 일명 백강(白江)이라 하였다. 이런 강물이 웅포에 접어들면 웅포강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던 곳이다.

고려 말의 최무선장군이 80여 척의 병선으로 500여 척에 의지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친 진포가 바로 이곳 덕양정 앞이다. 당시의 배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500여 척의 배가 뒤엉켜 전쟁을 할 정도면 현재의 금강만큼이나 커다란 강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웅포리의 나룻멀, 상웅, 하웅 모두가 포구와 관계된 곳들이다.

웅포면의 고창리는 고창(古倉)이라는 글자가 말해 주듯 옛 창고를 의미한다. 연대는 다르지만 이곳 역시 성당창과 더불어 조세를 실어 나르던 덕성창이 있었던 곳이니 물이 풍부하였던 것은 틀림없다.

이렇게 보면 최무선장군이 왜구를 물리치고 조운선이 드나들던 당시가 익산의 수로교통 중 가장 발달되었던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익산에 속하면서도 오히려 생활권이 강경에 가까운 망성면도 물과 관련한 이름이 있다.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이 배를 이용하여 도착한 곳이 황산포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에 해당한다. 이를 계기로 화산리에 기념 성당을 지으니 화산천주교회가 되었다. 그런데 이 성당 위의 언덕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이 바위는 배를 묶어놓는 곳으로 전하고 있다. 실제로 이 바위는 새로운 그물을 의미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나암(羅巖)이라 하는데, 줄이 잘 풀어지지 않도록 턱을 가지고 있어 밧줄을 묶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더불어 『문헌비고』와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곳 나암에는 조선 효종 때 세곡을 저장하던 나암창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은 세곡을 배에 실어 한양으로 보내야 했던 당시에는 주요 교통로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들이다.

금강동의 이름이 금강(金江)인 것은 물과 관계가 있고, 인근 석탄동의 고제가 이뜨기 혹은 이띠기인 것은 익산사람이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곳은 오래 전에 만경강 둑이 생겼던 곳이며, 내부는 갈대밭이 조성되어 물이 넘실대던 곳이었다. 최근까지도 큰물이 지면 침수가 되던 곳이 이띠기이며, 해마다 되풀이되던 수해를 방지하는 수문을 보강하여 이제는 침수를 면하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물에 대한 지명은 금마나 왕궁, 그리고 여산의 저수지처럼 높은 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을 설명한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해수면과 비슷한 높이에서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 혹은 이와 연결된 강물을 중심으로 들여다 본 것들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익산은 옛 이리를 중심으로 하여 낮은 지대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래서 배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곳곳에 남아있는 갈대밭의 흔적이 그를 증명하고 있다. 원래 이리라는 이름도 구도심 즉 여산이나 금마 및 왕궁 혹은 함라와 웅포 등지에서 볼 때 갈대밭 안에 자생적으로 생긴 마을이라는 데서 출발하였다는 설이 거의 정설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이리(裡里)는 물이 많은 곳이었으며, 익산 역시 북으로는 금강을 끼고 남으로는 만경강을 거느린 물의 고장인 것이다. 게다가 익산의 중심부에는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탑천이 흐르고 있으니 어찌 물이 없는 고장이라 할 것인가.

만약 어느 누군가가 현재도 익산은 물이 없는 고장이라고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익산의 번화가인 도심만을 익산으로 한정짓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전주처럼 도심지로만 이루어진 도시를 연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사실 익산은 도시와 농촌이 합쳐진 도농복합도시임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익산은 옛 이리지역만의 익산이 아니며, 옛 익산군지역만의 익산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익산을 가로지르는 수자원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식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물을 이용하여 훌륭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성장시켜 나갈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시민과 지도자들의 과제인 셈이다. 이제는 이리라는 틀에서 벗어나 모름지기 익산으로 거듭나야할 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