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68년 전 광복절! 그 날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꿈꾸는 세상살이 2013. 11. 12. 10:08

68년 전 광복절! 그 날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올 여름 더위는 유별났다. 공식적인 장마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연일 낮의 기온이 30℃를 웃돌았다. 예년의 경우 30℃를 넘으면 이런 더위는 돈 주고 구경하기도 힘든다고 하였었는데, 올해는 35℃를 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가운데 광복절이 있었다.

문득 68년 전 8월 15일은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날은 방방곡곡에 퍼지던 함성과 땀의 열기로 한반도는 온통 찜통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축하한다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내려쬐는 태양의 이글거림도 거들었을 것이다. 당시 그날의 온도를 재 보았다면 아마도 여름 기온 사상 최고의 온도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살을 태울 듯한 더위도 강점기에 받던 설움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을 것이며, 양산을 받쳐 들거나 선크림을 바르지 않았어도 어느 누구 하나 불평 한 마디 없이 동참하였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바라던 독립이요, 그 결실인 해방을 맞이하는 자세였을 것이다. 누가 이열치열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는지 알지 못하지만, 이참에 1945년 8월 15일 뙤약볕을 회상하며 더위를 쫒아보자.

광복절을 맞아 덥다덥다 하는 것도 모두가 다 내 나라, 내 조국이 있기에 가능함을 되새겨야 한다. 내가 불평하며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것도 모두가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내 나라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기까지 나라를 지켜냈던 선조들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 것이며,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영령들은 그 얼마나 될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화재 현장에서 불을 끄던 소방관 한 명이 순직하면 온 국민이 애도의 온정을 보낸다. 그리고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가족에 대한 생계걱정을 해준다. 이것이 우리의 정이다. 그런데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다가 숨져간 이들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이제는 잊혀진 일이라고, 그때 일은 잘 모르겠다고, 아마도 그에 따른 보상을 받지 않았겠느냐고, 자기가 태어난 시기는 그것도 자신의 운명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유관순, 손병희처럼 다행히 후세에 이름 석자라도 남긴 사람들이 그러할 진대,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목숨들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선열들이 과연 줄 하나 잘못 서서 받았던 우연이었기에 우리는 그들을 내팽개쳐도 된다는 말인가 묻고 싶다. 그런 세태를 반영이라도 하는 듯이 그들은 혹은 그들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입을 굳게 닫은 채 열지 않는다. 왜 그러냐고 굳이 묻는다면 독립운동을 한 사람, 혹은 그 가족이라는 꼬리표가 오히려 자신을 더 괴롭히고 더 힘들게 하기 때문이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현재 이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죽기 전까지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요즘 익산에서는 만세운동과 관련한 기사들이 넘쳐난다. 각 신문마다 삼일운동과 관련된 내용이 판을 채우며, 기관은 물론 직장에서도 모든 화두가 삼일만세 운동에 관한 이야기 일색이다. 그것은 아마도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알고 있는 상식과 지식이 넘쳐나서 저마다의 목소리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어느 특정 단체나 개인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 위하여 들추는 과거사라 하더라도, 국가의 이익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개인의 미래를 위하여 논하는 것이기에 좋은 현상인 것이다.

우리의 광복을 이끌어내는 데는 삼일만세운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주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싸운 일이나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일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삼일만세운동에 관련된 내용을 들여다보자.

돌이켜보면 1919년 3월 1일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외침이 들불처럼 이어졌으며, 우리 익산에서는 가장 강렬했던 4․4독립만세운동으로 번졌다. 이때 거국적인 3 ․1만세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명으로 구성되었다. 초기에는 이들이 각 교파별로 별도의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힘이 분산되면 일이 성사되기도 어려울뿐더러 더 많은 비용과 인력을 필요로 한다고 판단하여 통합 체제를 이루게 된다. 이때 남강 이승훈은 타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인 기독교인의 대표이면서도 각 종파가 연합하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제언하여 결실을 이루었다. 3․1운동의 대표는 천도교 측 손병희가 맡되 참가 구성인원은 기독교가 더 많도록 하는 절충안이 통과된 것이다. 이후 이 운동은 6개월에 걸쳐 수백만 명이 참가하는 민족운동이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약 1,600만 명이었다. 이중 기독교인은 약 20만 명, 천도교인은 300만 명으로 집계된다. 그런데 1919년 3월 1일 이후 12월말까지 투옥되어 복역한 사람은 19,525명이었으며, 그 중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2%를 차지하였다. 이것은 비록 숫자는 적더라도 기독교가 가진 민족의식과 절대 유일신 외의 우상 숭배에 대한 반감을 바탕으로 하는 응집력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예는 우리 익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익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3일 전주와 익산, 군산 등지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면서 그 서막을 열었다. 이때 천도교인 안종익은 독립선언서 2,000매를 가지고 와서 이리의 안중달에게 전달하였으며, 나머지는 전주의 천도교 본부를 통하여 각 지부에 전달하였다. 한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 김제출신 기독교인 김병수(1898.10.18~1951.05.22)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세브란스병원 제약실의 대구출신 이갑성(1889.00.00~1981.03.25)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200매를 가지고 와서, 스승이던 김제출신 군산영명학교 교사 박연세(1883.04.09~1944.02.15)를 비롯하여 고석주, 김수영, 이동욱, 이두열에게 95매를 전달하였다. 이를 받은 영명학교 교사들은 독립선언서 3,500매를 추가로 인쇄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머지 한 경로를 보면 기독교인 함태영은 최린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임영신에게 주었는데, 일부는 전주서문교회로 가져와 전주기전여학교와 신흥학교 등 미션스쿨에 전달하였다. 이는 후에 등사하여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배포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3월 4일 옥구, 5일 군산, 6일 김제, 13일 전주, 14일 전주, 16일 태인, 23일 임실, 4월 3일의 덕과, 그리고 4월 4일에는 익산과 남원에서도 각각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익산은 총 4회에 걸쳐 약 5,000명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사망자 16명에 실종자 50명이라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이는 운동 1회당 4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초기에 일어났던 옥구의 7회 5,700명 참석에서 32명 사망이라는 숫자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그만큼 치열하고 격렬했던 현장을 가늠할 수 있다.

당시 익산의 인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14년에 금마, 여산, 함열, 웅포, 용안 등이 익산군으로 통합된 후 익산면의 한 마을에 속했던 이리가 3,776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만 해도 예전의 금마, 함열, 웅포, 여산 등은 작은 군현으로 인구가 밀집된 고을이었다. 이에 비하면 이리는 이제 태동하는 마을이었으니 인구가 적을 것도 분명한 이치였다.

한편, 1925년에는 익산군 전체의 인구가 13만 5,503명이었다는 자료가 있다. 이때는 이리가 13,403명으로 제법 도시 다운 면모를 갖춘 때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쓰라린 과거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이리는 대전․이리간 호남선이 1912년 3월 6일 개통되고, 1912년 10월 15일 군산선의 개통, 1914년 1월 11일 이리에서 목포까지 개통, 1914년 11월 17일 이리에서 전주까지 연결되는 철도의 요지가 되었다. 이는 대구나 부산처럼 익산을 호남의 거점기지로 삼으려는 일본인들의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띠었던 것이다.

당시 이리에서는 시장 즉 현재의 남부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인들의 거주지와, 영정통 즉 현재로 보면 문화의 거리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이들 구역은 전북에서는 가장 유동인구가 많고 물자의 이동이 많은 지역으로 이름이 나서, 각양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그 유명세가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지리적 그리고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만세운동이 한 번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감안하더라도, 어린이나 노약자 그리고 임산부 등을 제외하였을 때 그리 만만치 않은 숫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통계에 나타난 참여숫자를 이리의 전체 인구에 비교할 때 인근 지역에서 많은 호응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다.

3․10만세운동

만세운동 당시 익산의 상황을 살펴보면, 4월 4일 이전인 초기에는 천도교를 중심으로 하였다가 나중에는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하는 형태를 띠었다. 한창 절정에 다다르고 있던 천도교의 교구장 박영진은 기독교 인사와 많은 물밑 접촉을 하였으며, 황등과 함열지역은 이중열, 여산과 용안지역은 이유상, 황화와 팔봉지역은 정대원, 오산과 춘포지역은 윤봉유, 함라와 웅포지역은 민영순, 성당과 낭산지역은 홍영섭, 망성과 금마지역은 고총권, 왕궁과 삼기지역은 신현성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1919년 3월 10일 저녁 9시를 그 첫 번째 거사일로 정했다. 당시 천도교인들이 많았던 사회 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이날은 천도교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가 고종 1년 대구 감옥에서 순도한 후 55회째의 음력 2월 9일이었으며 당시의 양력으로 3월 10일이었던 것이다.

거사를 앞두고 여산면 원수리의 정영모집에서는 마을 유지 이정과 박사국, 이병석 등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독립만세의 당위성을 알리며 계획에 대한 사전모의도 가졌다. 이런 준비는 각 면이나 마을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그리고 비밀리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16개면이라는 조직이 너무 방대하고, 전달체계를 오직 인편에만 의지하다보니 그만 사전에 발각되니 그날이 3월 3일이다. 여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고총권이 체포되어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지도자 박영진과 정대원 마저 체포되면서 집중적인 감시를 받게 되자 거사가 물거품이 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예정된 10일 밤 9시가 되자 익산 전역에서 횃불이 솟았다. 그와 함께 군중의 함성이 조용한 밤하늘에 메아리치니 사기가 충천하였다.

여산시위에서는 약 200여 명의 주민들이‘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헌병 분견대로 향했다. 면민들은 우렁찬 함성과 함께 애국의 기개를 드높였으나, 정문 앞 400m 지점에서 무력으로 일부가 체포되고 더러는 총칼에 부상을 당하는 중에 해산을 당했다. 이날 체포된 사람들은 1919년 5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1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 사람이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 축하의 만세를 부르는 것이 어찌 보안법 위반에 해당하느냐’며 반박하고 고등법원에 항소를 하였다. 이를 본 침략 당사자 일본인들도 나라를 사랑하는 여산면민들의 기개에 감동하였다고 한다.

왕궁면에 사는 김광덕과 송종석 역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음력 2월 17일 양력으로는 3월 18일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금마장터로 갔다. 그들은 친지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 만나는 모든 일반 면민들을 설득하며 만세시위를 종용하였다. 또 3월 28일 오후 1시경에도 시장 한복판에 나아가 ‘우리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자’하고 외치니, 주위의 군중 수백 명이 호응하여 만세를 불러 화답함으로써 감격과 흥분을 일깨우는 성과를 얻었다. 그 후에도 3월 30일 만세시위가 또 한 차례 있었다.

한편 3월 28일 오후 3시경, 춘포의 소진석은 주민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우리 조선 사람으로서 독립을 원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각처에서 모두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으니 우리도 독립을 경축하는 만세를 부르자!’고 외쳤다. 이에 누구의 선창이라 할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조선독립만세’소리가 터져 나왔고 온 군중들이‘만세’를 불렀다. 소진석은 군중을 모아 대오를 짓고, 그 앞에 서서 큰 거리로 행진을 하였다. 그러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과 맞닥뜨려지자 주동자 일부가 체포되고 군중은 무력 해산되고 말았다.

이 외에도 황등, 함열, 웅포, 망성 등에서도 크고 작은 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이리저리 쫒아다니기 바빠진 일본군에게는 익산에 주둔하는 병력을 1개 중대에서 2개 중대로 증강하는 빌미를 주었다.

만세운동의 횟수가 늘어나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천도교인 중심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심역할을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굳이 그런 이유를 들자면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 간의 신뢰가 두터워, 이처럼 비밀스런 거사를 꾸미기에는 아주 좋은 조건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집중적이고 일시에 힘을 모아 행동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에 응원군으로 옥구의 노춘만, 최공훈, 김종수를 비롯하여, 전주의 최재봉, 서석윤, 이원규 등이 합세하였다. 이들은 외지의 정보를 전하면서, 일군의 동태는 물론 이들을 피하는 방법까지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크고 작은 사전 운동들이 모여져서 익산 4․4만세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4․4만세운동

1911년 8월에는 익산군 익산면 금마에 있던 익산군청이 남일면 이리로 옮겨온다. 그리고 일제의 헌병 분견대와 익산우체국을 포함하여 각종 기관도 이리로 옮겨져, 마한시대부터 거대도읍지였던 금마시대를 마감하고 드디어 이리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리가 이처럼 급부상하게 된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쌀의 운송에 관한 문제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이리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으로 실어가기 위한 철도가 1912년에, 그리고 이리에서 전주로 이어지는 철도가 1914년에 개통되었다. 반면 생활의 편리성을 위하는 호남선을 보면 이리에서 강경을 잇는 철도가 1912년 3월 6일, 서울에서 목포까지 완전히 개통된 날이 1914년 1월 11일이다. 따라서 이리는 날로날로 번창하는 도시가 되었고, 철도교통의 요지로 많은 인파가 모이는 이리역에서 1919년 3월 16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리시민들은 일본 헌병이 사람들의 왕래를 일일이 감시하는 가운데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이리역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목포행 호남선 열차에 탑승했던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호응하여 그 수가 수백 명을 넘었다. 이때 문용기를 비롯한 기독교인 김병수, 오덕근, 최대진, 박병렬, 박영문, 장경춘, 박공업, 박학규 등은 사람들의 내왕이 많은 이리역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헌병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리에는 보병 4연대에서 1개 중대를 추가로 상주시키니 2개 중대가 배치되었다.

현재의 익산남부시장 일명 구시장에 해당하는 이리장터의 만세운동은 3월 10일 거사 이후 24일이 지난 4월 4일에 일어났다. 장경춘(1877.00.00~1919.04.04), 문용기와 박영문 등은 이리 장날을 기하여 일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키로 도모하였다.

당일 드디어 거사시간이 임박하자 이리장터에는 기독교인 중심의 600여 군중이 모여‘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치켜들었으며, 약속된 12시 30분을 기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이날 거사에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귀향한 중등학교 학생 김종현을 비롯하여 그의 친구 김철환과 이시웅 등도 참여하였고, 벌써부터 내려와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던 서울 세브란스의전의 김병수를 비롯한 여러 학생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문용기(1878.05.19 ~ 1919.04.04)를 주축으로 하는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면서 대열을 갖추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이들은 만나는 시장 상인들에게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면서도 한 손으로는 연신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에 고무된 상인들은 물론이며 모였던 군중들이 같이 손을 흔들어 만세를 부르며 따라 나서니, 그 수는 삽시간에 1천 명을 넘었다. 이들은 이리역을 거쳐 일제의 상징이었던 주현동의 일본인 대교농장사무실을 향할 때쯤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거대 행렬이 되어 있었다.

이날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의외에도 일제의 지배를 덜 받았던 남전교회 교인들과 남전교회에서 운영하던 도남학교(道南學校)의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였던 것이 주목할 만하다. 이런 현상을 비추어볼 때 동련교회 교인들과 동련교회에서 운영하던 계동학교(啓東學校) 학생들, 그리고 고현교회 교인들과 고현교회에서 운영하던 경신여숙의 학생들도 적극 참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당시 익산지역에서 많은 성도를 거느리고 계몽활동을 하던 교회들이 대거 참여하는 단결력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이리 4․4만세운동의 전개과정이다.

의외의 만세운동에 허를 찔린 일본 경찰과 헌병대는 행렬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지만 대열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결국은 기본 치안부대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일제는 다급히 지원요청을 하여 보병부대가 무력진압에 투입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

평화적 시위를 내세운 만세운동은, 무력으로 누르면 누를수록 더욱 강해져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일사분란하게 행동하였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만세소리가 높아만 갈뿐이었다. 군경의 무력으로도 어쩌지 못한 일본군은 당황한 나머지 최후의 수단으로 소방대와 인근 일본인 농장의 고용원들까지 동원하며 맞섰다. 농장에서 급파된 이들에게는 창검과 곤봉 그리고 소방대원들에게는 화재진압에 사용하는 갈고리가 들려있었다.

그러나 이미 죽기를 각오한 시위대에게는 그들마저 역부족이었다. 더 이상의 방법을 찾지 못한 일본군은, 시위대가 일본인 대지주의 사무실인 대교농장을 습격하는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일본인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과잉충성의 수단으로 드디어 실탄사격을 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문용기를 비롯하여 함께 선두에 나섰던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일명 서공유.1889.06.13~1919.04.04), 이충규(1891.07.14~1919.04.04) 등 6명의 희생자가 생겼고 부상자도 10여명이 되었다. 동시에 39명이 체포되면서 대열은 대교농장 앞에서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운동이 그렇게 일시에 사그러들지는 않았으니 4월 8일 용안면 화배리에서는 청년 김기동, 최팔만 그리고 14세 소년 길귀동이 주동이 되어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산 정상에서 마을 사람들과 여러 차례 규합하고 만세를 불러 4월 4일의 거사를 기억하는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1949년 4월 29일 익산시는 당시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남부시장에 이승만대통령 휘호의 '순국열사비'를 세워 넋을 위로하는 한편, 애국정신 및 역사교육의 장으로 조성하였다. 여기에서는 매년 3월 1일을 맞아 4ㆍ4만세운동의 감격을 떠올리며 재현행사를 벌이고 있다. 또 1976년 3월 4일에 세우고 2010년 11월에 중건한 비석으로는 오산면사무소 앞마당에 있는 것으로,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을 기리는‘순국열사충혼비’를 들 수 있다. 그런가하면 여산초등학교 운동장에는 2003년 5월 1일‘여산독립만세 운동기념비’를 세워 숭고한 희생에 대한 정신을 잊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있다. 한편 개인으로서는 동아일보사가 이리역전에 ‘삼일운동기념비’를 세우니 그 날이 1971년 8월 15일이었다. 이들 모두는 그날의 함성을 잊지 말자는 것이며, 그에 분연히 나섰던 선열들을 추모하자는 것이며, 다시는 나라를 잃는 비극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친일파의 후손들이 아직도 득세하고 일본의 역사를 부정하는 망언이 난무하는 마당에서, 우리가 우리의 주권을 굳건하게 할 구심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편, 위의 3․1만세운동이나 3․10만세운동 그리고 4․4만세운동에 있어 잘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4․4만세운동에서 크게 부각된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을지라도 그의 시발점은 김치옥이라는 것들이 그렇다.

김치옥은(1879.10.14~1934.01.01) 오산면 남전리 570번지에 살았으며, 김해김씨 후손으로 남전교회의 집사였다. 당시 부유한 농가였던 김치옥은 일제의 만행에 분개하고 있던 차,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고무되어 있었다. 그는 임피의 구암교회 교인 임종우를 위시하여 많은 신도들과 구암예수병원의 직원들, 멜본딘여학교 학생 등을 만나 거사를 도모한 후 군산 3․5만세운동의 주동자가 되었다.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중 같이 재판을 받는 도중, 같이 활동하던 임종우를 만나 익산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게 된다. 그 후 출소하여 남전교회의 창설요원으로 신망이 두터웠던 박성엽집사를 설득하여 거사를 준비한다. 박성엽은 1882년생으로 오산면 남전리 549번지에서 태어났다. 이때 미국인 광산에서 통역으로 일하던 문용기가 잠시 고향에 와 있다가 이에 동참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이들을 돕는 손길이 있었으니 직접 참여한 박영문, 박동근, 전창여, 강성원, 장만준 등도 잊어서는 안 될 인물들이다.

이렇게 피로 얼룩진 만세운동 이후에, 일제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지사들의 가족을 샅샅이 감시하고 있었다. 다시 어떤 계획을 세우는지, 이들을 돕는 자가 어떤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어떤 인물들이 움직이는지 조사하는 차원이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멀어져가는 비극이 생겨났다. 이들을 도우면 일제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역적으로 몰리고, 이들을 도우면 반드시 해를 입는 다는 공식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독립군의 후손들은 굶어 죽어가는 판이며, 독립군의 후손이 취직도 못하여 생계를 잇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독립지사의 후손인들 자신의 선조에 대한 자랑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의미있는 반성을 해보아야 한다.

황화정 교회의 담임목사를 통해 들은 어떤 여인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애써 피하고 있다. 그는 교인으로서 일제의 강압에 항거하여 싸우다 옥고를 치른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그 다음에 있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그를 돕는 일손은 물론 일상의 왕래조차 금하였으며, 특히 먹고 마시는 가장 기초적인 문제에 있어 엄금하였던 것이다. 결국 일제에 항거하던 부친은 굶어죽고 만다.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 본 여식이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까지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에 항거하였다면,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였다면 손해를 본다는 인식이 뿌리깊이 박혀있는 민중의 틈바구니를 헤집고 들어서지 못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황등의 어떤 사람은 전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때, 화장실에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경우도 있다. 이 사람은 옥중에서 자신의 소변을 받아먹으면서 미친 사람의 흉내를 내어 겨우 목숨을 건진 경우에 해당한다. 이처럼 미친 사람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 어찌 사람 사는 세상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사람도 애국활동에 대한 어떤 보상을 바라기는커녕 더 이상 손해만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어찌 이런 사람들이 한두 명에 그칠 것인가.

지금 이 순간을 보아도 친일파는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데, 독립운동을 한다고 전 재산을 팔아 치웠던 지사의 후손들은 당장 먹을거리를 걱정하는 비참한 신세를 못 면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 주소다.

아무리 여름 뙤약볕이 따갑다 하더라도, 익산시민이라면 역전의 기념비나 남부시장의 기념비, 혹은 오산면사무소의 기념비, 여산초등학교의 기념비를 둘러보고 조국의 고마움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져볼 것을 감히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