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특집]"3·1운동 세계사 유례없는 평화 시위" 95년 전 美언론 충격·감동
뉴시스 노창현 입력 2014.02.27 14:06 수정 2014.02.27 14:28【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일본 헌병대는 성명서를 들고 있는 소녀의 손목을 칼로 잘랐다. 소녀가 나머지 손으로 성명서를 들어올리자 이번엔 그 손목마저 잘랐다.'(AP통신 1919년 3월13일)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고 발로 걷어 채이며 칼로 찔리는 등 끔찍한 참상이다. 일본 군인들은 '한국 만세(Hurrah for Korea)'라고 외치기만 해도 총을 쏴서 죽이고 있다.'(1919년 3월17일 뉴욕 타임스)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평화와 인권, 자유독립을 부르짖은 3.1운동이 벌어졌을 때 AP통신과 뉴욕타임스 등 미국 유수의 언론들이 수많은 기사를 쏟아내며 독립을 열망하는 한민족의 뜨거운 기상을 세계에 알린 것으로 나타났다. 뉴시스가 미연방의회와 주요 신문사DB자료를 검색한 결과 삼일운동에 관련한 보도들은 한세기 전의 미디어로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상세하게 다뤄졌다. 특히 뉴욕타임스는 3.1운동이 세계사에 유례없는 대규모 평화시위라는 것과 관련, 1919년 4월 24일 ‘코리아’라는 장문의 사설을 통해 주류 언론으로는 처음 조선의 독립을 공식 지지했다. 사진은 성명서를 들고 있었다는 이유로 소녀의 두 손목을 잘랐다는 일제의 만행을 1면에 고발한 텍사스 엘파소 헤럴드 신문. 2014.02.27. <사진=미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평화와 인권, 자유독립을 부르짖은 3.1운동이 벌어졌을 때 AP통신과 뉴욕타임스 등 미국 유수의 언론들이 수많은 기사를 쏟아내며 독립을 열망하는 한민족의 뜨거운 기상을 세계에 알린 것으로 나타났다. 뉴시스가 미연방의회와 주요 신문사DB자료를 검색한 결과 삼일운동에 관련한 보도들은 한세기 전의 미디어로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상세하게 다뤄졌다. 특히 뉴욕타임스는 3.1운동이 세계사에 유례없는 대규모 평화시위라는 것과 관련, 1919년 4월 24일 ‘코리아’라는 장문의 사설을 통해 주류 언론으로는 처음 조선의 독립을 공식 지지했다. 사진은 3.1운동을 속보로 전한1919년 3월 13일, 14일 AP통신 기사.2014.02.27. <사진=NY타임스 DB> robin@newsis.com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평화와 인권, 자유독립을 부르짖은 3.1운동이 벌어졌을 때 AP통신과 뉴욕타임스 등 미국 유수의 언론들이 수많은 기사를 쏟아내며 독립을 열망하는 한민족의 뜨거운 기상을 세계에 알린 것으로 나타났다. 뉴시스가 미연방의회와 주요 신문사DB자료를 검색한 결과 삼일운동에 관련한 보도들은 한세기 전의 미디어로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상세하게 다뤄졌다. 특히 뉴욕타임스는 3.1운동이 세계사에 유례없는 대규모 평화시위라는 것과 관련, 1919년 4월 24일 ‘코리아’라는 장문의 사설을 통해 주류 언론으로는 처음 조선의 독립을 공식 지지했다. 사진은 3.1운동을 첫 보도한 뉴욕타임스 1919년 3월 12일자 기사 . 2014.02.27. <사진=NY타임스 DB> robin@newsis.com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평화와 인권, 자유독립을 부르짖은 3.1운동이 벌어졌을 때 AP통신과 뉴욕타임스 등 미국 유수의 언론들이 수많은 기사를 쏟아내며 독립을 열망하는 한민족의 뜨거운 기상을 세계에 알린 것으로 나타났다. 뉴시스가 미연방의회와 주요 신문사DB자료를 검색한 결과 삼일운동에 관련한 보도들은 한세기 전의 미디어로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상세하게 다뤄졌다. 특히 뉴욕타임스는 3.1운동이 세계사에 유례없는 대규모 평화시위라는 것과 관련, 1919년 4월 24일 ‘코리아’라는 장문의 사설을 통해 주류 언론으로는 처음 조선의 독립을 공식 지지했다. 2014.02.27. <사진=NY타임스 DB> robin@newsis.com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평화와 인권, 자유독립을 부르짖은 3.1운동이 벌어졌을 때 AP통신과 뉴욕타임스 등 미국 유수의 언론들이 수많은 기사를 쏟아내며 독립을 열망하는 한민족의 뜨거운 기상을 세계에 알린 것으로 나타났다. 뉴시스가 미연방의회와 주요 신문사DB자료를 검색한 결과 삼일운동에 관련한 보도들은 한세기 전의 미디어로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상세하게 다뤄졌다. 특히 뉴욕타임스는 3.1운동이 세계사에 유례없는 대규모 평화시위라는 것과 관련, 1919년 4월 24일 ‘코리아’라는 장문의 사설을 통해 주류 언론으로는 처음 조선의 독립을 공식 지지했다. 사진은 한국에서 일본의 '공포정치'가 자행된다는 1919년 3월 17일 NY타임스 기사. 2014.02.27. <사진=NY타임스 DB> robin@newsis.com
3·1 운동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평화와 인권, 자유 독립의 운동이었다. 지금으로부터 95년 전인 1919년 3월1일부터 근 3개월 간 연인원 200여만 명(일제 추산 106만 명)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가세한 3·1운동에 대해 AP 통신과 뉴욕 타임스 등 세계 언론들은 수많은 기사를 쏟아내며 독립을 열망하는 한민족의 뜨거운 기상을 세계에 알렸다.
뉴시스가 미 연방의회와 주요 신문사 DB 자료를 검색한 결과 3·1운동에 관련한 보도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고 한 세기 전의 미디어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상세하게 다뤄졌다.
이들 매체가 전한 3·1운동은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의 평화 시위였고 총과 칼로 유린당하는 순간에도 비폭력으로 맞섬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서구인들에게 큰 감동과 놀라움을 주었다.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문 채택과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들의 선언문 낭독으로 시작된 3·1운동은 삽시간에 수많은 군중들이 합류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고 행진에 들어갔다.
삽시간에 시위대가 수만 명으로 불어나자 일본 헌병대는 이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며 무려 1만 명을 체포했고 어둠이 몰려온 오후 6시께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3·1운동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다음날 서울 일대에서 '조선 독립 만세' '조선의 독립 정부를 세우자'는 함성을 외치며 평화 행진이 계속됐고 평양, 창원, 천안 등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3·1운동은 처음엔 외부에 한국인들의 폭동으로 잘못 알려졌다. 당시 조선엔 상주하는 미국의 취재 기자가 없었고 도쿄와 베이징에서 간접 취재하는 방식이어서 즉각적인 소식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와 행진을 목격한 미국 선교사들과 일부 기자들을 통해 3·1운동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미국 언론은 비상한 관심을 갖고 취재를 시작했다. 처음 보도가 나간 것은 3월12일이었다. 취재를 위해 서울에 온 AP 통신 기자가 보도했고 베이징에 있던 뉴욕 타임스 기자도 같은 날 전문(cable)을 통해 긴급 타전했다.
▲ AP 3월12일 첫 보도
AP는 "정의와 휴머니티를 앞세운 코리아가 2000만 국민을 대표해 독립 선언을 했다. 선언문에서 '우리는 4300년 역사에 걸쳐 독립된 나라였다. 우리의 독립 선언은 현재의 고통스런 상처를 없애고 국가적 기상과 활력을 고취시키며 불법적인 일본 정권의 압제에서 벗어나 우리의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고 영원한 자유를 구가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하고 '오늘의 독립 선언은 일본에 복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일본 정치인들이 폭력적인 정책으로 저지른 잘못들을 바로 잡기 위함이다'라고 당당히 외쳤다"고 전했다.
뉴욕 타임스는 규모가 엄청나다는데 주목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독립 운동이 당초 알려진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것으로 전해졌다. 3월1일 민족주의자들은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고 행진을 펼쳤다. 일본은 3월3일 고종의 장례식에 시위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서울역 등 주요 지역에 헌병대를 투입했다. 일본은 독립 운동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지만 이후 수천 명을 체포하는 등 신속한 강경 진압에 나섰다. 일본 헌병대는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평양의 장로신학교 학생들을 체포해 옷을 벗기고 그들을 묶어 놓은 채 고문하며 너의 하나님처럼 견뎌보라고 학대했다. 일본인들은 독립 운동을 제압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한국인들은 수면 아래서 펄펄 끓고 있다. 일본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이 자치정부의 능력을 갖출 때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는 제안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13일부터 14일까지 베이징과 오사카, 워싱턴에서 타전한 AP의 기사를 15일 묶어서 '평화 시위 참가자 4만 명 체포'라는 제목으로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특히 13일 베이징발 기사로 일제의 잔학한 만행을 고발했다.
"베이징에 모인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독립 선언은 기독교와 불교, 천도교 대표들과 청년 학생들을 포함한 300만 명이 하나가 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의 목적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서방 국가들의 관용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 지도자들은 조선에선 이미 4만 명이 투옥됐다고 주장하며 일본의 잔학한 진압의 한 가지 사례를 들었다. 한 소녀가 성명서를 한 손으로 들고 있을 때 일본 헌병대가 칼로 손목을 잘랐고 소녀가 다른 손으로 성명서를 들자 그 손마저 잘랐다는 것이다. 또한 체포된 사람들은 감옥에서 일본 경찰의 고문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텍사스의 엘파소 헤럴드는 3월14일 일제가 소녀의 두 손목을 자른 만행을 1면 톱으로 생생하게 보도해 미국 독자들을 전율케 했다.
14일 오사카발 기사는 독립 운동이 전국 85개 지역에 확산됐으며 일제의 진압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가운데 시위 선동 혐의를 받는 외국 선교사들이 그같은 사실을 부인했다고 전했다. 이어 "조선부 총독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郎)는 이 같은 소동의 원인은 잘못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개념 때문이라면서 '이번 결과로 조선 당국의 문제가 드러났으며 이를 일본 정부가 바로잡겠다'고 언급한 사실을 덧붙였다.
▲ 美국무부 3·1운동 왜곡…폄하
이날 워싱턴에서는 미 국무부가 3·1운동을 조선인들이 언론 자유와 기타 불만 사항을 시정해 달라며 소요를 일으켰다고 폄하 왜곡하는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전해 시선을 모았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
'3월12일 서울을 비롯한 지방에서 사실상 시위가 중단됐으며 공식적으로 시위 참여자의 15%만이 기독교 신자로 파악됐다. 시위 지도자들은 새로운 정치적 종교계의 사람들이며 외국 선교사들은 독립 운동에 관계되지 않았다는 전문을 국무부는 받았다. 시위의 목적은 언론의 자유와 청원권, 학교에서 한국어 학습, 기타 불만 사항을 시정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 국무부의 성명서는 불과 나흘 만에 심각하게 왜곡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선 땅에 있던 미국 선교사들이 베이징에 와서 일제의 만행을 증언한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18일 헤드라인을 '미선교단 한국의 평화적 독립 운동 설명', 부제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잔인성 고발' '한국 전역에서 공포정치(Reign of Terror) 자행'이라고 단 기사를 올렸다.
타임스는 "선교사들에 따르면 한국인들에게 야만적 잔인성이 가해지고 있다. 한 목격자는 '최근 열흘 간 벨기에에서 독일인들이 자행한 것과 같은 행위들을 목격했다.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무차별로 두들겨 맞고 발로 채이며 칼로 찔리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으며 일본 군인들은 '한국 만세(Hurrah for Korea)'라고 외치기만 해도 총을 쏴서 죽인다'고 전했다. 선교사들은 독립 운동의 원인은 일본이 1910년 합병 이후 10년 간 한국 국민들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족 지도자들은 일본의 어떠한 행위에도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고 한국 국민들은 무기도 없었다. 한국인들은 일본 군부에 의해 탄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평화적으로 세계에 알리는 독립 운동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AP는 3월18일 베이징발로 "한 미국인 목사는 조선의 독립 운동이 역사상 놀랄만한 평화적인 저항 운동이라고 말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3·1운동 직후 일본 경찰이 교회를 폐쇄하고 조선인 목사를 구속했다면서 '우리는 지난 10년 간 목격한 일제의 잔인성에 대한 침묵을 깨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이와 노인들을 구타하고 여성들이 칼에 난자당하는 등 잔혹한 참상에 대해 절대로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편 AP는 "두 명의 미국 여성 선교사가 총을 소지한 일본 군인에게 구타당하고 다른 선교사들도 모욕을 당했음을 입증하는 진술서에 서명 제출했다. 한 미국 영사도 서울에서 일본 군인에 의해 체포됐으며 미국인 동료가 그가 영사라는 사실을 알린 후에 풀려났다"고 덧붙였다.
4월8일 AP는 "인디애나 출신의 사무엘 모핏, 아이오와의 앤슬 질리스, 오하이오의 엘리 모우리 등 목사 3명이 독립선언문 인쇄를 도운 혐의로 체포됐다"면서 "이중 모핏은 1890년 조선에 건너가 1893년 평양에 정착했다"고 소개했다.
4월9일 애리조나의 비스비 데일리 리뷰(Bisbee Daily Review)'는 샌프란시스코발 기사로 "한국의 독립선언문 사본이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 나라 정부에 전달됐다. 이들이 한국의 독립을 위한 노력에 귀기울여 달라고 호소한 편지에서 '최근 수 년 간 수천 명의 한국인 엘리트들이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고 수십만 명이 탄압을 피해 외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잘 훈련받았고 서구 사상에 대한 이해가 높으며 모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며 한국이 독립된 정부를 세울 준비가 된 나라임을 알리고 있다.
12일 뉴욕 타임스는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증파한 사실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한국인 교수 1명과 학생들이 체포되고 외국 선교사들은 3명의 영국인과 5명의 미국인이 체포됐으나 모우리 목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풀려났다"고 전했다.
타임스는 사흘 뒤 "미 국무부는 평양에서 소요 사주 혐의로 체포된 장로교 엘리 밀러 모우리 목사가 일본의 법에 저촉된 게 확인된다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미국이 지배하는 필리핀에서 일본인이 미국법을 따라야 하는 것처럼 일본의 지배를 받는 한국에서 미국인도 같은 입장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13일 뉴욕 타임스는 "필라델피아에서 이승만과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헨리 정 등 3인이 '3·1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항거한 평화적인 만세 운동으로 볼세비키 혁명이 아니다'라며 일부에서 3·1운동을 폭동으로 오인하지 않도록 적극 밝히는 모습이었다.
▲ NYT 3·1운동 계기 "한국 독립 정부" 지지
많은 목격자들의 증언과 취재를 통해 3·1운동의 실상을 알게 된 뉴욕 타임스는 4월24일 역사적인 사설을 올리게 된다. '코리아'라는 장문의 사설은 3·1운동을 통해 조선인들을 다시 보게 됐음을 알리고 주류 언론으로는 처음 조선의 독립을 공식 지지한 것이다. 다음은 사설 요약문.
'한국인들은 실질적으로 우수하며 지성적이라는 것이 입증됐다.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보다 스스로 훨씬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독립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평가됐지만 이번 운동을 통해 대단히 애국심이 많고 통제력이 있으며 잘 조직돼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한국인들은 흥분을 잘 하는 민족으로 알려진 게 사실이다. 50년 전에 선교사들을 살해하고 고문했으며 선박을 불태웠지만 이번 만세 운동에선 폭력적인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평화 시위만을 했다. 유럽의 사례와 비교해도 한국인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정치적인 능력이 우수하다. 일본은 한민족을 열등하다고 간주하곤 했다. 그러나 한국을 일본에 병합하여 제국화의 길로 가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한반도의 2000만 명을 친구로 만들 것인지 적으로 만들 것인지는 일본에 달려 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통치는 일본의 이익을 훼손할 것이다. 미국 또한 한국의 독립이 성공적인 해결책이며 한국인들이 자체 정부를 갖도록 개혁되야만 한다.'
뉴욕 타임스의 사설 이후 3·1운동은 미국의 식자층 사이에 조선 독립을 뜨거운 이슈로 만들었다. 이 와중에 한 미국인 교수가 독립 운동을 폄하하는 기고문을 올리자 뉴욕에 있던 독립운동가 헨리 정(구 미한국위원)이 조목조목 반박하는 기고문을 5월18일 오피니언란에 실었다.
그는 "'한국 봉기의 원인'이라는 기고문을 올린 조지 래드 교수는 친일 학자로 보인다. 그는 너무나 무지하고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날을 세웠다.
헨리 정은 "3월6일까지 한국에 있었던 '새크라멘토 비' 신문 편집장이 3·1운동을 보고 "경탄할 만한 평화적 저항 운동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한국인들이 폭력 진압을 당하면서도 누구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고 지적했다.
또한 "3월 17일까지 서울에 있던 캐나다 토론토 장로교회 M.A. 암스트롱도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조직적인 행진을 하는 것에 감동했다. 한국인들은 기획력이 있고 모든 것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탄복했다'고 말했다. 래드 교수는 어린 소녀가 성명서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양 손목을 절단한 것을 아는가. 미국 선교사들도 일본 경찰에 구타당했다. 한국에서는 탄압에 항의해 상점은 문닫고 아이들은 등교를 거부하고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받은 전문에 따르면 여전히 같은 상황이다라고 지적했다.
▲ 헨리 정의 명문 '한국의 케이스'
헨리 정은 훗날 '한국의 케이스(The Case of Korea)'라는 저서에서 일본의 야욕과 한국이 독립해야 할 당위성을 감동적인 명문으로 전달했다. 다음은 글의 요약문.
"세계는 비극으로 가득 하며 인류의 양심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로 이미 과중한 부담을 겪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비극을 겪고 있는 나라는 문명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경우이다. 우리는 아르메니아와 벨기에가 겪는 수난을 슬퍼해 왔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극동의 자그마한 은둔 왕국보다 더 국제적인 정의의 실현을 요구하지는 않았었다.
일본의 한국 통치에 대한 내역을 모르는 서양 사람들에게 1919년의 독립 운동과 이와 관련해서 자행된 일본의 잔학 행위는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1919년 한국인들이 보여준 민족주의 정신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이래 쌓여온 불꽃이 폭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인들이 저지른 잔학 행위는 1905년에 설치된 이후 활동을 벌여온 통감부 정책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중략)
아마도 한국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단일 민족이다. 그들의 역사는 약 4000년에 걸쳐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국만큼 위대한 문화를 가지고 있고 일본보다는 어디를 봐도 위대한 나라이다…(중략)
일본은 그들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것들은 자체 방위, 식민지의 필요성, 한국을 돕기 위한 자선적 동기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면밀한 검토를 받을 필요조차 없으며 국제 정의와는 동떨어진 주장이다. 한국에 있는 30만 명의 일본인들은 이주자로 온 것이 아니라 착취하려고 온 사람들이다…(중략)
일본인들은 개척자가 아니다. 그들은 모험심이나 진취적 기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이룩해 놓은 것을 몰래 가로채고 있을 뿐이다…(중략)
한국이 현대 문명에 발맞춰 나가도록 한국은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돕는다는 3번째 주장은 몸서리쳐지는 위선이다. 한국에 들어간 이래 일본은 터키적 잔학성과 독일적 능률주의 그리고 일본 특유의 교활성을 발휘해서 한국인들을 착취했다. 일본은 그런 일을 자행하면서도 한국인들을 자국 국민과 동등하게 사랑한다고 떠벌리고 있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한국인들을 형제처럼 사랑한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수 많은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으며, 형무소 안에서는 수많은 무고한 한국인 남녀들이 매맞아 숨지고 있었다. 개혁의 약속은 이제 피로 씻겨 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왜 일본은 한국을 소유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300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한국을 침략한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중국으로 자기 군대를 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을 정복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한 것이며, 오늘날 그것은 실현을 봤다.
범일본주의(汎日本主義)의 궁극적 목표는 아시아 전체를 일본의 지배 아래 통합시키는 것이며, 그런 다음 태평양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것이다. 아시아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일본은 한국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해서 한국을 군사적 작전 요지로 사용하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한국을 점령한 일본의 진의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범독일주의자이건 아니면 범일본주의자이건 간에 정복자에게는 정의나 인도주의는 관심 밖의 일이며 아무리 호소를 해도 소용이 없다. 그는 전략적인 문제에만 귀를 기울이며 힘에 의한 명령에만 복종한다. 따라서 한국 문제는 일본의 관점에서 볼 때는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서구 학자들 가운데 아직도 인근 침략국과 대항해서 주권을 보장할 능력이 없는 나라는 독립을 향유할 권리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그 땅에서 몰아낼 위치에 있지 못하면 외국 지배를 감수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이것이야말로 케케묵은 낡은 사상에 기초한 냉소적이고 차거운 주장이다. 인간성에 대한 진실한 믿음도 힘 앞에서는 아무런 주장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무력제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한국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탄원은 1세기 전 다트마우스컬리지사건 때 대니엘 웹스터가 배심원들에게 행한 연설 내용과 같다.
'그곳은 가난하고 작은 시골이다. 그러나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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