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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서 독립운동했는데.. 후손은 고국서 찬밥

꿈꾸는 세상살이 2014. 3. 1. 07:39

해외서 독립운동했는데.. 후손은 고국서 찬밥

9형제와 귀화한 이무열씨 14년째 막노동에 암까지
귀화한 후손 38%가 무직… 무주택자는 무려 89%나
독립유공자 후손 입증 못해 불법 체류자로 살기도
지원 법안은 국회서 낮잠
한국일보 | 정지용기자 | 입력 2014.03.01 03:39
1919년 3월 21일 경북 안동 편항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옥고를 치른 뒤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이어간 독립운동가 이승연(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선생의 손자 이무열(65)씨. 그는 2000년 3월 형제 아홉 명과 중국 국적을 버리고 한국으로 귀화했다. 그러나 그토록 그리던 조국 땅에서 그가 맞닥뜨린 것은 가난의 굴레였다. 조국이 이들 형제에게 준 것은 3,500만원이 전부였다. 1인당 350만원 꼴이다.

27일 서울 명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씨는 "14년째 막노동과 청소 일을 하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있다"고 했다. 고된 노동으로 무릎 연골이 모두 닳아 2009년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고 지난해 4월에는 전립선 암에 걸려 투병 중이다. "그래도 독립운동가의 후손인데 허름하게 사는 모습을 기자에게 보여주기 싫다"며 약속 장소를 따로 잡은 그에게 할아버지의 명예를 지키며 살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중국 러시아 등에서 항일운동에 헌신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한국에 돌아온 뒤 생존 전쟁에 내몰리고 있다. 정착지원금은 턱없이 적고, 일부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해 불법 체류자로 살아간다. 불합리한 정책이 낳은 희생양이다.

국가보훈처의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 국내 정착 실태조사'(2011)에 따르면 정착금 지원을 시작한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지원 대상 393명 중 38%(149명)가 무직자, 42%(167명)가 막노동과 식당 일 등 일용직에 종사하고 있다. 또 대부분(89%, 349명)이 무주택자였고, 보훈처가 정한 '생계곤란층'(도시근로자 가계지출의 40% 미만)이 21%에 달했다. 한 후손은 "정부가 직업교육이라도 해 줬으면 이렇게 비참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손들의 바람은 '비정상의 정상화'다. 정부는 2005년 6월부터 해외 독립유공자 2,3세 중 1인에게만 지원하던 정착 지원금을 세대 당 최대 7,000만원까지 늘리도록 법을 개정했지만 소급적용은 불허했다. 법 개정 전 귀화했다는 이유로 130명이 이무열씨처럼 가족 수와 관계 없이 3,500만원만 지원 받았다. 이씨는 "똑같이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인데 왜 귀화시점에 따라 차별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어이 없는 처사"라고 말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임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것도 문제다. 중국 지린(吉林)에서 항일교육운동을 벌이다 일본군에 피살된 음성국(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선생의 외손자 방흥국(58)씨는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인정을 받겠다"며 1996년 10월 17일 한국에 왔다. 지린성 교육청 장학사 직함도 버린 그에게 보훈처는 "조상과의 관계를 입증하라"고 요구했다.

외조부 고향이 개성이라 가족관계 증명 서류를 구할 수 없었지만 정부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불법체류자 신세로 지내면서 가족들과 다른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증언 등을 모아 꾸준히 법무부에 제출한 끝에 지난해 8월 특별귀화 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한국인으로 맞는 첫 3ㆍ1절이 감개무량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새누리당 황영철 의원은 ▦2005년 6월 법 개정 이전 귀화자에 대한 정착지원금 소급적용 ▦주거지원금 지급 ▦정착에 필요한 기본교육 및 직업훈련 지원 등을 담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2012년 8월 발의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1년 6개월이 지나도록 무관심 속에서 국회에 계류 중이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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