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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변호인' 김병로 선생의 삶

꿈꾸는 세상살이 2014. 3. 1. 07:42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변호인' 김병로 선생의 삶

아호도 '거리의 사람'…"죽을 먹어도…법관은 정의의 수호자 되라"
"법관은 양심과 이성을 생명처럼 알아야 합니다.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는 것을…"

대법원은 13일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의 서거 50주기를 맞아 법률가이자 정치인, 독립운동가 등 다양한 면모와 업적을 조명하는 행사를 연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던 김병로 선생은 1948년 초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해 사법부 독립의 기틀을 세웠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법률지식을 활용한 독립운동에 힘썼고 민법·형법의 권위자이자 정당 활동까지 아우르는 광폭 행보를 보여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문필가 고 이은상 선생은 가인 선생의 비문에서 '민족의 울분을 참지 못해 사회 투쟁을 결심했고, 눈물겨운 변론으로 피를 끓이며 독립투사 구출에 있는 힘을 다하고, 민족정기 앙양과 인권 옹호를 위하여는 언제나 선봉이 됐다'고 썼다.

김병로 선생의 아호인 가인(街人)은 말 그대로 '거리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거처할 곳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독립을 염원하던 김병로 선생이 직접 붙인 것이다.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도 가인 선생은 주저하지 않고 독립운동가 변론에 몸을 내던졌다.

대한광복단을 결성하고 일제 독립운동 탄압의 본거지였던 서울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김상옥 의사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형사재판 변론은 유명하다.

당시 언론은 가인 선생의 변호에 대해 "조리가 있고 매우 열띤 변론"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유조리(有條理) 최열렬(最熱烈)한 변론'이라고 소개했다.

가인 선생은 공판에서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 사상은 조선인 전체가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정치 변혁을 도모했다고 하여 처벌한다면 양민을 억지로 법의 그물에다가 잡아 넣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광복 후에는 사법부 독립의 기틀을 세웠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도 '불편한 관계'였지만 법관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서민호 의원이 자신을 살해하려던 육군 대위를 권총으로 사살해 기소된 사건에서 1심은 정당방위를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도대체 그런 재판이 어디 있느냐"라고 따졌지만 가인 선생은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무죄 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받아 넘겼다.

사법부의 '큰 어른'으로서도 숱한 일화를 남겼다.

박봉에 시달리던 시골 판사가 사표를 들고 찾아오자 그는 "나도 죽을 먹으며 산다. 함께 참고 고생해 보자"고 만류했고, 판사 회의에서는 "사법관들은 오직 정의의 변호자가 됨으로써 사법의 권위를 세우는데 휴식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6·25전쟁 중에는 부인이 북한군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을 겪었지만 개인적 어려움을 뒤로 한 채 법전 편찬, 사법부 운영에 매진했다.

민법을 제정할 때에는 일본 민법을 대체하는 독립적인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형법에서는 '실질적 위법성'을 따질 때 우리 형법에만 있는 고유한 표현인 '사회상규(社會常規)'를 고려해야 한다라는 이론을 내세워 법조문에 담았다.

행정부로부터 법원을 독립시켜 3권 분립 원칙을 제도화하는 데 기여했고 사법부의 수호자와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김병로 선생은 '사도 법관' 김홍섭 전 서울고법원장, '검찰의 양심, 도시락 검사장'으로 불린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과 함께 법조계의 큰 스승이자 '법조 3성(聖)'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경제민주화 전도사로 불리는 김종인 전 새누리당 행복추진위원장이 김병로 선생의 친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