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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꿈꾸는 세상살이 2014. 6. 18. 22:03

아직도 가야 할 길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고되다고 말한다. 그러니 인생은 고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 즉 삶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인생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자그마한 기쁨에도 기쁨이요 축복이라 더 이상 고통스러울 일이 없을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노력을 하지 않고 훈련을 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인생은 많은 경험과 일어날 수 있는 예상 상황도 책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삶의 무게를 얼마나 더느냐 혹은 얼마나 값진 인생을 살아가느냐는 그 사람의 독서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학교나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이 과정에서 독서나 학습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혼자 노력하는 방법을 습득시키기 위하여 원하지 않는 숙제를 내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숙제를 하나의 불편한 과제로 생각하여 회피하려고만 한다. 때로는 영웅 심리에 편승하여 숙제를 거부하기까지 한다. 숙제를 통하여 먼 앞날의 인생 고뇌를 벗어나기보다, 우선 숙제를 푸는 신체적 고통을 벗어나는 것이 더 좋다는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광의의 현실도피에 속한다. 훗날 닥칠 고통을 생각하지 못한 근시적인 판단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정신적, 영적 성장이 거부되며, 때로는 만성 정신질환 상태를 유발하기도 한다. 고통을 체험하였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잠시 잠깐의 배움이 남은 인생 여정에 큰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인지한다면, 사람은 남은 인생이 많을수록 즉 어린 나이일수록 더 빨리 배움이라는 기술을 경험하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하면 10세 이하인 유아기 때부터 발달시키는 것이 좋다. 아직 많은 것으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더 빨리 더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는 연령이며, 이 기술 역시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쓴 약과 단 약이 있다면 먼저 쓴 약을 먹고 나중에 단 약을 먹는 것이 낫다. 뒷맛이 앞맛을 상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숙제를 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미룬다면, 나중에 두고두고 숙제가 따라다니는 것을 감당해내야 한다.

아이들은 마른 스펀지와 같아서 주변의 색깔을 그대로 빨아들인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혹은 주변 인물들의 행태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닮아가는 것이다. 술 취한 부모, 화내는 부모, 공부하는 부모, 매를 드는 부모 등 어른이 살아가는 방식을 답습하는 아이들은 의도하지 않아도 닮아간다. 부모가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이를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사랑으로 혼동하기도 한다. 흔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물질적인 배려로 사랑을 감추는 부모가 있지만, 이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아이들은 새로 사준 장난감보다 부모와 함께 먹었던 맛없는 음식을 더 추억으로 간직하는 생리를 가지고 있다. 의존성이 강하면 배려를 모르며 사랑받기를 갈구한다. 애정결핍은 아이들을 자유와 도덕적 능력을 감퇴시킨다. 이런 경우 자시의 단점을 고치려 노력한다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일을 게을리 하여 무기력한 증상을 보이는 수동적인 아이로 자랄 수 있다.

돈으로 해결하는 혹은 말로 하는 사랑보다 몸으로 함께 하는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자존감이 강하고 배려심이 많아 정신이 건강하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다. 더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푸는 고통쯤은 어느 아이가 더 잘 견딜 수 있을지도 짐작할 수 있다. 훗날 어른이 되어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 어느 날에도 그런 유형의 문제를 해결해본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주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어릴 적부터 많은 유형의 문제를 풀어보고 해결하는 것은 훗날 어른이 되어서 닥칠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습의 효과이며 혼자서 체득하는 독서의 힘이다. 철저한 상명하복의 관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일 수록 어떤 문제에 봉착하면 우선 보고는 잘하지만, 다음 행동 역시 명령을 기다리는 성향이 강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조치후보고를 해야 할 정도로 긴급한 상황에서도 창의적인 행동을 하기 보다는 지극히 제한적인 부분에 국한하여 임시조치를 하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 이것은 평소 문제 해결에 대한 노력의 부족에서 빚어진 현실기피 현상과 일치한다.

이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는 자신이 문제를 풀어야 할지 말지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현재 당장의 편의를 위하여 훗날 닥칠 풍요로움과 권리 그리고 자유를 포기하는 일에 속한다. 이런 현상은 잘못 된 것임을 누구나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수고와 노력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차라리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얻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이며, 개혁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저자 스캇 팩은 이런 문제까지도 어릴 적 받았던 학습에서 형성되는 습관의 효과라고 말한다.

크고 작은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현재 자신의 감정을 잘 전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나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말하는 것이 훌륭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 할까 말까 망설일 정도의 문제일수록, 말을 꺼내기 곤란하다고 생각할수록 더 솔직하게 말하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해야 될 말을 하지 않고 미룬다면 어쩌면 그런 말을 해야 될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거짓말 혹은 거짓 표현은 현재 상태를 덮어 둘 수 있어도 나중에 펼쳐질 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불안감까지 덮어 주지는 못한다. 정직하게 사는 것 혹은 자유롭게 사는 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훈련과 노력에 의해 숙달된 기술로만 가능한 것이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두 남녀가 결혼을 하면 이 둘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여 잦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처리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언어가 자유로워지고 문화를 이해하면 사소한 실수에도 화를 내고 비난하게 된다. 이것은 내가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고 상대방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주기 바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베풀만한 때에 즉 베풀어야 할 때에 베풀어야 한다. 베풀지 않아도 되는 때에 무조건적으로 베풀게 되면 상대방은 원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받기만 하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때 주는 사랑은 집착 혹은 애착에 속하며, 나의 감정을 누르고 의지에 의하여 사랑을 줄줄 알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사랑 역시 훌륭한 기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상대를 잘 이해하려면 즉 상대방을 사랑하려면 나의 일을 멈추고 상대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은 나의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랑이란 자아를 확대하여 성장시키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면 그것은 상대방보다 나를 우선시하였기에 폐쇄적인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때 현재까지의 생활 양상에서 변화되는 즉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나가야 하며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깨뜨려야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정신이 필요하며,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여야 한다. 지금까지를 종합해보면 사랑은 훈련되어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현재까지는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었다면 누구든지 자신의 노력으로 고칠 수도 있는 것이다. 잘못 된 사랑이 마치 주인인양 행세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즐겁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이 고해 자체라면 모든 것을 신에게 의지하여 해결할 수도 있다. 원래 신은 인간을 만들 때에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을 기쁘게 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인간적인 일은 항상 힘들고 어렵다는 말이 된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무생물로부터 진화하여 생성된 개체라고 설명한다. 처음부터 신에 의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가장 신빙성있게 주장하는 열역학의 법칙을 위배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물에서 단 세포가 진화하여 바이러스가 되었으며, 다시 박테리아, 짚신벌레, 연체동물, 곤충, 어류, 조류를 거쳐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이것이 에너지 불변의 법칙 혹은 에너지 체감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모순을 뚫고 나타난 위대한 힘 즉 기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을 자신이 개척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원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 재수가 없었을 뿐이며, 기대하던 일이 벌어지면 나의 노력에 의해 일어났다고 말한다. 이 말을 살펴보면 잘 되면 내 탓이지만 안 되면 운명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반대로 해석하여 잘 되어도 운명이며 잘못 되어도 운명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어찌하여 잘못 된 것에만 운명이라는 말로 비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면 잘 되든 잘못 되든 모든 일은 나의 힘 외에 가해지는 어떤 힘 즉 나도 모르는 다른 힘이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절대자의 힘이라고 말한다. 교통사고를 당하여 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모두 죽었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이때의 기적은 사람의 힘이 아닌 즉 운전자가 저 사람은 살아남으라고 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아니며, 그 사람 자신이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든 의도하였든 자신의 힘보다 월등히 큰 어떤 힘에 의하여 살아남았다는 것쯤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앞의 과학자들이 주장하던 미생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하였다면 그 수많은 기적의 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인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적의 힘은 대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그것은 인간 외 절대자의 힘이라는 것 외에 다르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단세포인 미생물이 신에 대한 아무런 학습도 없어 종교적 선택을 하지 않았음에도, 벌써 절대자는 그 어떤 기적의 힘을 부여했다는 말이다. 그 종교가 기독교인지 불교인지 혹은 목상인지를 가리기 이전에 말이다.

이런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절대자의 권력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다가 현실 세계와 내세를 이어주는 종교의 사이에서 혼돈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내세에 일어날 일을 현세적 방법으로 해석하여, 죄를 현세의 생활에 적용하는 예마저 생겨난다. 이런 경우는 영적인 형벌과 육체적 형벌을 구별하지 못하는 처사로 영적 성숙이 덜 된 상태라 말할 수 있다. 신이 주는 계명을 지키지 않아 내세에 받아야 할 형벌을 현세의 생활에서 벌을 받는 것과 착각하는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주는 고통이 바로 자신과 같은 형태로 되기를 바라는 학습이며, 종국에는 신이 할 일을 인간이 맡아서 하라는 계시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모든 신이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에게 고통으로 연단한 후 자신과 같은 영광으로 다스리는 자리에까지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성장의 목적지이다.

따라서 인간은 신의 삶과 같이 숭고하게 살아야 하며, 신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 원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이 우리에게 준 은총인 것이다.

신과 화합하는 즐거움을 상상하며 수행하는 것보다, 짧은 기간에 벌어지는 연단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게으름을 피운다면 결국은 신이 요구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만다. 이 또한 자신의 의지보다는 신의 선택에 의해서 일어나는 결과이다. 아주 오래된 예로부터 인명은 재천이라 하였다. 모든 일은 신의 은총을 받은 대로 일어나는 것이라서, 앞에서 말했듯이 사고 난 차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살고 싶다는 자기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이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결론이다. 그러고 보면 절대적인 힘이 부족한 인간이라면 신에 의지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신이 부여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신이 부여한 평등과 사랑, 신을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감상

저자는 정신과의사로서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들 즉 내담자들로부터 많은 의견을 들었다. 그러나 상당수는 초기 상담시에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로 인하여 치료가 더디게 나타나며 일부는 전혀 성과가 없이 끝나기도 한다. 이는 자신을 들어내기 싫은 자신의 표현이며, 이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게으름의 표현이기도 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방어의 본능이 있는데, 이는 자기 변명으로 통하기도 한다. 무슨 일이든 새로운 것에는 두려움과 고통이 따른 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미리 보호막을 치고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일을 감추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 경우,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새로운 환경을 맞으면 주변의 기온은 차가운지 더운지, 공기는 탁한지 맑은지, 바람은 부는지 잠잠한지, 주변 사람들은 친절한지 불친절한지 하는 두려움이 현실에 안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옷을 준비한다든지, 체력을 기른다든지,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함을 잘 알기에 이 과정을 헤쳐 나가는 노력을 하기 싫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이런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차피 인생이 고해라면 이를 극복하는 방법 외에 다른 아무런 방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려운 학문에 대한 두려움, 자식을 잘 양육할 일에 대한 두려움, 지금 거쳐야 할 고된 육체적 훈련에 대한 두려움, 지금 말해야 하지만 말하기 곤란함을 극복해야 하는 두려움 등 모든 일이 두려움의 연속이다. 한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 고비를 넘겨도 다른 고비를 맞게 되며, 어려운 역경을 이겨냈어도 다른 역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을 닮아가는 수행의 과정이다. 사람이 신처럼 자유롭고 사랑으로 가득 찬 영광의 위치라면 고해의 길을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피조물인 사람들은 신을 닮아가는 삶 즉 노력에 노력을 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인생 자체인 것이다.

이 책이 처음에는 사람의 관계를 이야기 하다가 나중에는 신과의 관계로 끝을 맺는다. 얼마 전에 들었던 사람은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말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신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며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신을 닮아가는 삶을 산다는 것은 완벽하기를 바란다는 것인데 이는 그만한 대가를 치른 후에야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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