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탱자! 꽃이 피다

꿈꾸는 세상살이 2007. 5. 4. 10:30
 

탱자가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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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예전에 보았던 꽃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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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  꽃이 피다

 

 

 

 

 

 

 

탱자나무에 꽃이 피었다. 어쩌다 한 번 피는 꽃은 아니지만 그래도 탱자 꽃이 흔한 편은 아니다. 예전에는 시골 울타리가 탱자나무로 둘러싸인 집이 아주 많았었다. 그러나 요즘은 생활의 편리함과 집안의 보안성, 그리고 생활수준이 높아진 데 따른 격조를 높인다고 하여 차츰 사라지고 있다.

탱자나무는 우선 가시가 생각난다. 이 가시는 길고 가느다라면서도 딱딱하여 아주 날카로운 형상을 하고 있다. 이리저리 뾰족하게 뻗은 탱자나무 가시는 손이 들어갈 틈도 주지 않고 촘촘하다. 이런 형상 때문에 농촌에서는 울타리대용으로 심어둔 나무였다.

탱자나무는 그리 굵지는 않지만 나무 자체가 단단하고 마디가 많은 축에 속한다. 어렸을 때 이 탱자나무를 잘라 고무줄 새총을 만들어 사용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탱자나무는 너무나 단단하고 결이 곧아서 작은 못을 박아도 쉽게 쪼개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겉은 해삼 멍게지만 속은 사군자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고 가시가 많은 나무에 집을 짓고 사는 동물들도 있다. 뿌리 쪽에서는 들쥐가 흙에 구멍을 뚫고 뿌리 사이를 비집고 다닌다. 탱자나무 뿌리 역시 이리구불 저리구불 복잡하게 굽어있어 쥐들의 집으로는 안성맞춤인가 보다. 하긴 이렇게 복잡한 미로라면 개나 고양이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만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쥐구멍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보아도 볕들 날이 없을 것이다. 

이 탱자나무 울타리를 놀이터 삼아 살아가는 새도 있다. 물론 이 나무만 앉아 사는 것은 아니지만 뾰족한 가시 사이를 파닥거리며 드나드는 새가 있다. 물론 그 새는 아주 작은 새다. 그래야 마치 튼튼한 그물망 속에 들어가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안전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새를 잡는 것이 그물인지, 아니면 새가 안전하게 살아가는데 그물을 이용하고 있는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세상의 이치에 완전한 것이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음과 같은가 보다.

탱자나무는 훌륭한 재목으로서 우리 집을 짓는데 사용된다거나, 관상수로서 아름다운 정원을 꾸며주는 식물도 아니다. 그렇다고 땔감으로서 밥을 짓는 데 사용되지도 못하고, 영양분이 풍성한 열매를 제공하여 사랑받는 식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평등을 위하여 해마다 강제로 머리를 깎기도 하고, 불거져 나온 뱃살은 비만치료를 위하여 지방흡입술도 서슴지 않는 식물이다. 그리하여 틀 속에 집어넣고 규격화된 벽돌을 찍어내듯 네모반듯하고 절도 있는 나무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 쓸데가 없는 그런 식물인 것 같으나 탱자나무는 구박을 받으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작년에도 올해도, 지켜보는 이가 없어도 혼자서 그렇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탱자나무 꽃을 보면서 하나의 생명을 보았다. 온 몸을 가시로 뒤집어쓰고도 자신을 구박하지 않는 식물을 보았다. 주어진 상태로 불평하지 않으며 자신을 사랑하고 후손을 이어갈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런 식물을 보았다. 그것은 매일같이 지나치면서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탱자나무였다. 50년 전 내가 보았던 탱자나무는 지금도 변한 게 없다. 가시 모양이나 이파리의 모양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아름드리나무로 변해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거기 그대로 서 있었는데, 그동안 내가 잊고 살았을 뿐이다.

이런 탱자나무도 내일이 오면 다시 잊혀질 것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떨어져 살고 있다는 이유로, 나에게 직접적인 이로움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잊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다시 찾아 볼 탱자나무는 노란 열매를 달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켜보든 말든, 누군가가 칭찬을 하든 말든 자기의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