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15일. 다부원에서
지도를 보면서 이리저리 살피는데 낯익은 단어가 들어온다. 언젠가 교과서에서 보았던, 대구 방어선 하나를 놓고 한 달 스무날이 되도록 전투를 하였다는 그곳도 바로 오늘의 다부동이었다.
그때는 전쟁이 중단된 직후라서, 반공이 한창 주류를 이루었고 멸공이 그 기저에 깔려 있었다. 가는 곳마다 반공과 멸공 일색이었으니 다부동에 대한 이야기는 가히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다부동은 나의 가슴 속에 깊은 상처를 주었고, 마음속의 순례지로 남게 되었다.
사전에서는 다부동 전투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낙동강 방어선 가운데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다부동은 대구 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로서, 만일 다부동이 적진에 떨어지면, 대구가 지상포의 사정권내에 들어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 약 21,500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초기에는 북한군이 T-34전차 약 20대를 투입하였으나, 나중에 14대를 증원하는 정도로 치열하게 맞섰다. 또한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이에 반해 국군 제1사단은 보충 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하여 총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 등 열세의 전투력으로 대항하였다. 국군은 이러한 여건을 극복하면서 이른바 8월의 총공세를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후 국군은 미군 제1기병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으나, 미군은 9월의 총력전에서 다부동의 주저항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개시된 총반격으로 다부동을 탈환하였다.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기시키고, 죽음으로 지켜냈던 국군의 기상을 드높이는 의미로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유학산 기슭에 국군 제1사단의 전공을 기리는 다부동지구전적비를 세웠다.
1950년 그날의 다부동 전투시에도 어쩌면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앞을 가리는 소낙비도 아닌데, 바람이 불어올 때면 비를 동반하고 왔다. 전쟁이라는 회오리가 마치 격렬한 포화와 더불어 열을 식히는 잠깐의 소강상태처럼 비도 그렇게 내렸다. 주적주적 비가 내린다. 그러다가 잠시 갠 하늘을 보여주기도 하는 그런 가을이다.
전쟁의 기억을 지우지 말라고 늘어선 무기들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얼마나 많은 피를 불러들였던 무기들인가. 살상을 하다하다 못해 자신마저 깨트리고 찢어져버린 상채기를 가진 무기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결같이 고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자신들의 주인은 아직도 예전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 곪고 피가 나는 채로 누더기를 걸치고 있건만, 그들은 어느새 철부지 아이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또한 그날을 기억조차 하기도 싫은 다부원은, 꼬챙이로 패이고 피로 얼룩져 붉었던 속살을 감추고 이제는 희망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긴 너희들이야 무슨 생각이 있었겠느냐, 그것은 모두가 주인들 탓일 텐데. 나는 아물지 않은 상처 사이로 빗물이 스며든 줄도 모른 채, 오늘도 그냥 진통제 몇 알로 쓰린 가슴을 달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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