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나의 주변 이야기

신사당에 세워진 충혼탑 그리고 그 이후

꿈꾸는 세상살이 2007. 10. 16. 10:24

 

충혼탑이 버려진 그곳은 다시 신사당으로 돌아갔다. 신사당이란 신사가 있는 집이라는 뜻인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신사는 온데간데없고, 그냥 그렇게 이름만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마을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나는 신사당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었다. 신사당 주변에 살던 친척이 계서서 항상 신사당 그분이라고 불렀던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분도 돌아가시고, 그 자식들마저 고향을 떠난지 오래다. 과거를 기억하시는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께 여쭤보아도 그곳에 신사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 내 기억 속에 신사당이 남아있으나, 각별한 추억이 없는 우리 아이들은 신사당이라는 이름을 생각조차 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곳의 또 다른 이름은 충혼탑이다.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는 현충일마다 성대한 기념식을 하는 것을 보아왔다. 넓은 장소와 4층으로 된 높은 축대위에 석탑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것이 국가 유공자의 충혼을 기리는 탑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렇게 불렀었다.

 

내가 보았던 충혼탑 주변에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지천으로 널려있고, 벌써 고목진 나무는 군데군데 썩어가고 있을 정도였다. 이파리가 진초록으로 변해 하늘을 가리던 유월에 하얀 채알이 쳐지고 수많은 의자도 날라져 왔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광장을 메우면 이내 식이 거행되었다. 지서에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면 일제히 묵념을 하였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면서 식장은 갑자기 울음바다로 변해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요란하게 총을 쏘아댔다.

탕 탕 탕 탕... 순간 온 세상은 총소리 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 요란하던 총소리가 끝나자 사방은 오열하는 여인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하였다. 마치 자신들이 총에 맞아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한 것처럼 울부짖었다.  총구는 분명히 충혼탑의 꼭대기 부분을 향하고 있었는데 어이하여 하얀 옷을 입은 저 여인들이 오열하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울다울다가 정신을 놓아 버렸고, 서둘러 들것에 실려 나가면서 사태가 진정되기 일쑤였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요즘도 신사당은 변함이 없었다. 여러 계단을 거쳐 올라가는 석축이며 4단으로 된 축대도 그대로였다. 심지어 신사를 알리는 입구의 일주문 기둥자리도 그대로였다. 살결이 부드러운 벚나무는 상하여 없어졌으나, 일부 남아있는 고목에서 새로운 가지를 뻗어내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신사로서의 위엄은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신사가 있던 축대 안 마당에 생활체육시설이 들어 선 것이다. 거기에서는 옛 신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노인 분들이 게이트볼 경기를 하는 중이었다. 언감생심, 신사 안 마당에서 한국 사람들이 호탕하게 웃으며 남녀가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여가 운동을 하다니 상상이나 했었을까. 저 노인들의 웃음은 그 옛날 머리 조아리고 읍하던 슬픔을 대신하고 있는 것일까. 수탈과 고통을 주던 강점기의 아픔을 달래주고는 있을까.

 

 

 

 

 

나는 노인들의 웃음 속에서 또 하나의 슬픔을 느꼈다. 그 보기 싫던 신사를 뭉개버린 기쁨보다도, 기억조차 하기 싫은 신사를 지워내는 즐거움보다도 더 슬픈 것은, 충혼탑이 있는 성역을 폐허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농 통합에 의하여 옛 충혼탑은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다. 내버려진 영혼들의 쉴 곳은 온통 풀밭이 되었고, 어찌하다 만든 것이 생활체육시설인데 그것도 게이트볼장 일색이었다.

 

 

 

 

온 국민의 위로를 받던 충혼탑이 언제부터 버려진 석물로 변해버렸는지 안내문구 하나 없이 멍청히 서 있었다. 이곳이 정녕 충혼탑이 있던 성역인지 의구심이 든다. 침략자는 없는 조건을 만들어서 정신무장을 강요하더니만, 우리는 있던 환경도 마다하고 스스로를 망각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신사당을 없애고자 세웠던 충혼탑이 물러가면서 다시 신사당이 활개를 치지 않을까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2010년  봄에 신사당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렇게 수없이 드나들던 곳인데 이번에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마음이 없으니 있어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리라.

신사당에 오르는 제2단 석축부분에서 일장기를 대신하는 동그란 원모양을 발견하였다. 석축을 쌓으면서도 정사면 방향으로 수평과 수직을 맞춰 일관되게 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 홍예문을 쌓던 것처럼 돌에 각을 주어 돌려가며 쌓았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석축을 쌓을 때는 잘 다듬어진 모양을 가지고 쌓는다. 이때 돌의 모양이 마치 개의 이빨과 같다고 하여 견치석이라고 한다. 이 견치석을 쌓을 때는 좌우 상하를 맞워 수평과 수직을 잘 고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견치석을 마름모형태로 세워서 쌓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마름모 모양으로 일정하게 쌓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원모양을 만들기 위해 쌓다보니 견치석을 마름모꼴로  세워서 쌓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황등은 돌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라도 돌에 관한한 많은 상식을 갖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나 역시 직접 돌에 대한 연구하지 않았지만 항상 보아온 것이 돌이고 돌을 다듬으며 일하는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은 세월이 20년을 넘는다. 그뿐 아니라 제1단과 3단 그리고 제4단에서는 정상적인 견치돌 쌓기 방식으로 쌓은 것을 보아 일부러 둥그런 원모양의 상징을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나라 어디에도 이렇게 완벽하게 옛 흔적을 가진 신사당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사당을 좋아서 간직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아픈 흔적이라고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아무리 과거의 흔적이라 하더라도 좋지 않은 것은 없애야 하고, 치욕적인 것은 더더욱 그것을 지워야 한다고 말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그말도 맞는 말이다. 괜히 아픈 상처를 들쑤셔서 피를 흘릴 필요가 있겠는가마는, 우리가 힘이 없어서 당한 것은 두고 두고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겨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통해 미래를 개척하는 민족의 자세일 것이다.

 

제2단 석축부로 견치돌을 쌓은 모습이다.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 합하면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단 석축 상단부의 모습. 여기에 신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의 기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1단 석축과 계단모습.

 

   

 

제3단 석축과 제4단 석축을 한눈에 바라 본 것.

 

 

우측은 제4단 석축이 있으며, 제3단 상단면의 폭은 그리 넓지 않다. 

 

좌측은 제3단과 제4단 석축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다.

 

좌측으로는 제3단, 우측으로는 제4단 석축부분의 윗모습이다. 여기에 충혼탑을 세워놓았다. 여기에 약간 넓은 공간이 있어 현충일에는 많은 의자를 놓고 채알도 쳐서 행사를 하였다. 충혼탑 뒤로 또 하나의 석축부분이 보이는데 이것은 황등관덕정에서 활을 쏘다보니 위험하여 최근에 하나의 석축을 다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제3단 석축상단의 평지로 벚나무가 심어져있다. 예전에는 여기에 큰 나무들이 많이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고사되었다. 벚나무는 재질이 연약하여 가지가 잘린 부분에서 먼저 썩어들어가고 급기야 말라죽는 경우도 생긴다.

 

제3단 석축부분. 계단의 우측에 난 모양이다. 좌측은 3단부분과 4단부분이 합쳐져 있다.

 

제2단 석축부분, 여기에서 계단의 좌우로 견치석이 원을 그리며 쌓인 것이 보인다.

 

제1단 석축부분. 견치돌은 다섯 개,  계단은 11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