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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 폭발사고를 아십니까

꿈꾸는 세상살이 2007. 11. 8. 15:21
 

이리역 폭발사고를 아십니까?

 

 

 

1977년 11월 12일, 나는 중고등학교를 줄곤 열차로 통학하던 이리역을 부대 이동차 통과하고 있었다. 수도 없이 타고 내리던 역이라서 눈을 감고도 역의 풍경을 그려낼 것만 같은 추억들이 서려있는 곳이다. 고향의 역이라서 그런지, 광주에서 교육을 받다가 후반기 교육을 위하여 지나가는 것이라서 그런지 감회가 새로워 열차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설레임도 잠시뿐, 홈에 도착하자마자 두리번거리며 어젯밤의 흔적을 찾아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움푹 패인 웅덩이, 역에서 보이는 달동네의 부서진 집들, 역사의 유리창은 깨어져서 퀭한 눈을 뜨고 있는 것같았다. 그래도 오고가는 사람들과 더욱 더 커다란 기적소리를 내며 주의하라고 일러주는 열차들로 여느 일상과 다름없는 풍경들이었다. 그러기에 평온하게만 느껴지는 이곳에 그토록 커다란 폭발사고가 있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당시 이리시는 시내 밀집인구 13만 명의 아담한 소도시였었는데, 1977년 11월11일 금요일 저녁 9시15분 역 구내 폭발사고로 온 시가지가 난리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무슨 사고가 나면 항상 안전 대피장소로 꼽히는 학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내의 모든 학교가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역에서 가까운 학교들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화약을 실은 차량의 폭발이었는데, 11월9일 밤에 인천을 출발하여 광주로 향하던 열차로부터 전개된다. 인천을 떠난 열차는 영등포역에서 하룻밤을 지센 뒤 11월 10일 아침 9시26분에 출발하여 이동하게 되었다. 이 열차가 이리역에 도착한 시각은 11월10일 밤11시31분이었고, 이리역에서 광주로 가는 열차로 바꿔 연결되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리역은 광주 목포로 이어지는 호남선과, 여수 순천으로 이어지는 전라선, 서대전을 경유하여 서울로 향하는 경부선, 그리고 군산으로 갈라지는 군산선의 분기역으로서 철도교통의 요지에 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고가 발생한 날의 열차는 광주로 향하는 호남선에 속했는데, 영등포에서 내려온 열차는 전라선이었기 때문에 이리역에서 방향을 잡아주는 화차를 달리하여 출발하도록 되어있었다. 따라서 각종 화물칸이 각기 정해진 방향의 열차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교환대기 철로에서 기다리게 되는데 이 화물칸도 4번 대기선에서 정차 중이었다.

그런데 이 화물차는 한국화약공업주식회사에서 제작한 다이나마이트 800상자와 뇌관 36상자, 초안폭약 200상자, 흑색화약 3상자를 합쳐 30.28톤이나 되는 화약류를 싣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아쉬움은 철도운송법에서 화약류의 운송을 출발지와 도착지가 직통으로 연결되는 열차로 운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다는데 있다. 만약 규정을 준수하여 직통으로 가는 열차에 화약을 실은 화물칸을 연결하였더라면 더욱 더 안전하고 빠르게 운송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사고 당일 푹발물을 가득 실은 열차가 인천에서 이리역에 오는데 약 26시간이나 걸렸고, 그 이후에도 곧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이리역에서 다시 밤을 보내게 된다. 당시 화약 운송 책임을 맡았던 신무일 호송원은 이리역측에 즉각 출발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하나, 여러 사정으로 늦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화가 난 호송담당은 술을 마셨고, 캄캄한 화물차의 화약을 지키는 임무 때문에 화물칸에서 계속 대기하여야만 하였다. 당시 나이 36세의 신무일씨는 화약운송 호송경력이 7년이나 되는 제법 노련한 직원에 속했다. 아니 어쩌면 위험하지만 열악한 철도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노련한 직원이라 해도 11월의 차가운 밤을 철제 차량 안에서 체온으로 버티며 보낸다는 것은 말로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이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화물칸은 원래 조명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방폭 장치를 한 조명 시설이 있었을리 만무한 당시의 환경에서, 그는 위험하지만 양초에 불을 댕기고 말았다. 차가운 공기와 어두운 주변은 그를 유혹하였고, 특히나 이미 술을 마셔버린 상태에서 사리 판단을 흐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밤과 낮이 구분되지 않는 화물칸에서 촛불은 허공을 밝히다 못해 자신마저 불사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11월11일 저녁 9시15분에 촛불은 추위를 막아주던 두꺼운 침낭과, 화약을 포장한 상자에 옮겨 붙었고 이내 폭발을 일으키고 말았다. 화약을 지고 불 속에 뛰어 든다는 우리 속담이 있는데, 이번에는 불을 짊어지고 화약더미에 뛰어든 격이 되고 말았다.

이 폭발사고로 사망 59명, 중상 185명, 경상 1,158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각 학교에서는 마지막 입시 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교실에 남아 있었고, 당시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 쇼를 하고 있어 많은 인원이 관람 중이었다. 각 가정에서도 월드컵 본선 진출을 놓고 이란과의 축구경기 중계를 시청하고 있을 때였다. 온 시가지가 조용한 가운데 들린 폭발음은 가히 천지를 진동하는 것이었다. 처음 폭발이 있은 15초 후에 다시 2차 폭발이 있었고, 연이어 3차 폭발도 일어났다.

폭발로 인한 진동과 바람, 그리고 굉음의 파장은 역 인근 500m 이내의 건물을 붕괴시켰고, 4km이내의 건물을 파손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8km나 이격된 곳의 유리창까지 깨어지는 등 시가지는 온통 폐허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사된 바로는 전파된 가옥이 811동, 반파는 780동, 경파는 6,042동으로 집계되었다. 이로 인해 1,674세대에서 7,873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특히 역 주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가옥들이 낡고 튼튼하지 못한 것도 피해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리역의 대형 사고는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955년에 발간된 한국 교통동란기는 1950년 7월12일 오전11경, 이리역에 폭격사고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때는 한국전쟁 기간 중으로 밀고 밀리는 전선이 수원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따라서 적군에 의한 폭격은 아닌 것이 확실하고, 아군에 의한 오인 폭격이나 작전에 의한 고의 폭격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사고로 50여 명이 숨지고 300여명이 다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당시 이리역 운전사무소장이었던 최석구씨와, 같은 내용을 증언하는 이근배씨에 의하면 이날 이리역 상공에서 미군의 폭격기가 수차례 선회비행을 하다가 무차별 폭격을 하였다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한국 교통동란기는 이날 새벽 금강대교가 작전상 폭파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낮에는 이리역이 폭격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한국철도 100년사에서는 1950년 7월13일 금강철교가 폭파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3일 후, 아군은 1950년 7월15일 또 다시 이리역을 2차 폭격하고 있었다. 하늘을 선회하던 미군의 B29폭격기는 수많은 폭탄을 쏟아 부었고, 이것이 마치 선전물처럼 보여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환영하다가 일순간에 당한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1950년 7월 1일 미국의 극동군 ‘스트레이트 메이트’ 사령관이 북한의 남진 속도를 늦추기 위하여 B29 승무원들에게 내린 주요교량 파괴 지시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미군은 7월10일 미 제5공군을 한국으로 이동시키고, 북한을 저지하기 위하여 한강 이남을 중심으로 후방차단작전을 펼치게 된다.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미군은 7월10부터 7월26일까지 폭격출격 횟수 130회, 사용한 폭탄 수 1,100개로서 517개의 목표를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대량 소송이 가능한 철도의 차단을 전공으로 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철도교통의 요지였던 이리역 폭격사건의 전말이다. 이때 모든 지휘는 대전의 ‘엔젤로’ 통제소에서 내려졌는데, 대전은 이리역 폭격사건 발생보다 10일도 늦게 함락되었던 것으로 보아 아군의 작전상 폭격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미국은 계속하여 이리역 폭격사건은 실수에 의한 오인 폭격이었다고 말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이리역 아군 폭격사건은 차치하고라도 화약 폭발사고가 발생한지 30년이 지났다. 오는 2007년 11월11일은 30주년 추모식이 열린다. 이날 행사에서는 새로운 익산의 중흥을 위하여 비전을 제시하고 정책소개를 가질 예정이다. 폭발사고 당시 공연을 하였던 하춘화씨를 초대하여 익산시 명예홍보대사로 위촉한다. 한편 당시 조연으로 출연하던 고 이주일씨는 사고현장에서 자신보다도 주연을 더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던 것으로 전해졌었는데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이제 이리시는 없다. 도농 통합에 의해 익산군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익산시가 탄생한 것이다. 익산시민은 과거의 쓰라린 상처를 싸매고 새로운 비전을 향하여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사망자 유족과 부상자들도 원망과 갈등을 씻고 상생과 화합의 길을 갈 것이다. 이것이 진정 폭발사고 30주년 추모식이 가지는 참뜻일 거라고 생각해본다. 남들은 국적도 없는 빼빼로 데이를 맞아 희희낙락할 때, 익산시민들은 과거의 아픔을 딛고 세상을 품는 웅지를 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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