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아무나 하나
아침 일찍 병원에 다녀왔다. 인근에서 가장 이른 시간인 아침 8시30분에 진료를 시작한다는 병원에 도착한 것은 8시15분이었다. 마침 올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일기예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지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병원 건물의 문은 굳게 닫혀있고, 현관 입구에 서서 문 열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리저리 잰 걸음을 청해보기도 하였다.
지루함을 달래주려는 듯 교차로에는 차량의 소음보다도 더 큰 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선전원들의 확성기 소리가 꽉 차있었다. 진짜 경제를 살릴 사람은 누구라느니, 어느 누구가 이 나라의 경제를 몽땅 말아먹었다느니, 믿고 따를 사람은 누구라느니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위장전입도 하지 말고, 위장취업도 하지 말고, 부동산 투기도 하지 말고, 세금도 잘 내고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해보았다.
사람이 본의 아니게, 경제적으로 가진 것이 없어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촌부들이 한 순간의 판단 착오로 실수를 하였더면 이해를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백억 원의 자산가가, 이미 사회적인 지도자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어설퍼 보이고, 허술해 보이고, 애처로워 보였다. 슬프고 안타까워 동정심이 일어나는 애처로움이 아니라, 자기가 행해온 일과 지금 외쳐대는 소리가 너무나 격이 맞지 않으니 애처로울 뿐이었다.
이 추위에 열심히 흔들어대는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일당을 받고 직업으로 일하는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선전원은 일당을 받고 일하지만 대통령 후보는 일당을 받고 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병원 문은 정확히 8시30분에 열렸다. 진료의 시작이 아니라 건물의 문이 열리고 접수를 시작한 시각이 8시30분이었다. 원무과의 남자 직원은 흩어진 신문들을 모으더니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밖에서 얼었던 몸을 녹이려는 순간 병원 안은 한바탕 찬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말 할 것도 없고, 이제 막 틀어놓은 온풍기에서도 찬 바람을 맘껏 뿜어내고 있었다.
접수대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진료는 8시 45분쯤 되면 시작할 것이란다. 그러나 진료안내서에는 8시30분부터 시작한다고 하고 왜 늦게 하느냐고 따져 묻지는 않았다. 이른 참이라 15분 동안에 내 시간 계획에서 많이 늦어질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조금 지나자 간호사로 추정되는 여자가 뛰어왔다. 그래도 하이힐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신발 앞 뿌리로만 뛰는 모습은 애교스러웠다. 그 사이 남자 직원은 진찰실이며 주사실, 대기실, 측정실 등의 모든 창문을 닫고 기물들을 제자리에 놓는가 싶더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보통의 경우라면 여직원들이 접수대며 대기용 의자나 진료대 등을 닦고 정리 정돈을 한 후에 업무가 시작되는 것이 통상이었다. 그러나 처음 와보는 이 병원은 아마도 오래 전부터 이렇게 업무가 구분되어 있는가 보구나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헐레벌떡 뛰어와서 옷 갈아입고, 하이힐 벗은 손이나 제대로 씻었는지 눈치를 주는데, 그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지금까지 행동으로 보아 대답도 하기 싫었지만 차마 대 놓고 그럴 수도 없었다. 내가 이른 아침부터 병원의 손님들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없으며, 그로 인하여 다음 환자들에게 돌아갈 화풀이성 대우가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진찰실로 가보라는 말에 어디가 어딘지 몰라 기웃기웃하다가 들어간 곳에는 예의 접수창구 남자 직원이 앉아 있었다. 그랬다. 접수를 하던 그가 바로 병원의 원장이었다. 그를 보자 다시 걱정이 앞선다. 인쇄잉크가 묻은 신문을 주워들고, 창문을 여닫으며 온풍기를 켜고, 각종 기물을 정리정돈하던 그 손을 제대로 씻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의사가 말하길 하루에 8번 이상 손을 씻어야 한다고 하던데...
사람은 각자 자기가 하여야 할 일이 따로 있다. 의사보다 간호사가 먼저 출근하여 청소를 하고 환자를 맞으라는 말이 아니다. 누가 먼저 출근을 하든, 화장실 청소를 누가 하든지 보다는 그 뒤에 자기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이 있다. 의사가 행해야 할 도리가 있고, 간호사의 도리가 있으며, 정치가도 국민의 지도자도 그 자리에 합당한 도리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리에 어울리는 도리를 행하지 못하면 다음은 불행이 닥칠 것이다.
의사는 그냥 일당 받고 일하는 직업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물며 국가의 최고 영도자나 국민의 지도자는 그냥 보수를 바라는 직업적인 생각으로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통령은 돈이 없어 수학여행에 참석하지 못하는 학생의 비용을 아무도 모르게 대납할 수 있는 선생님의 애정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마을 안길을 넓히는데 구부러진 곳의 자기 땅을 선뜻 내주는 마을 이장의 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어린이 놀이터에서 깨진 유리조각을 줍는 환경미화원의 배려정신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신호 없는 삼거리에서 상대방 차량과 한 대씩 한 대씩 통과하는 운전자의 양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대통령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기 가족을 떠나 투쟁하던 임시정부 지도자의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설령 내가 가진 부와 권세가 많다 하더라도 흉년에는 땅을 사 들이지 않던 최부자처럼 백성을 사랑하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가난하고 힘들던 시절에 동생들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었던 장남과 장녀의 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비록 먹을 것 입을 것 참아가며 재활용품을 팔아 모은 피와 같은 재산 전액을,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놓은 촌부처럼 백년대계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은 사람이 교통사고 없는 사회를 위하여 신호를 잘 지키며 교통법규를 지키는 시민처럼 준법정신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집의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 되어 맨 아래 진흙 속에 묻히며, 습기도 막아주고, 벌레도 막아주며 무게도 견뎌내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모름지기 지도자로서 선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할 자리에는 사명감과 공명심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의사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통령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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