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야 세상이 보인다.
눈을 뜨면 길이 보인다. 그 길은 세상의 도시와 건물을 연결해주기도 하고, 공원과 건물을 연결해주는 길이기도 하다. 그 길로 우리는 걸어간다. 바쁘면 뛰어 가지만 여유가 있으면 잠시 걸터앉아 쉬어도 간다. 길은 이렇게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길을 내 편한대로 다루고 있다. 내 욕심에 따라 길의 용도를 달리하고 가치를 달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김장으로 배추 200포기를 하는 친구가 있다. 같이 살고 있는 식구라야 핵가족이니 기본이면 될 것이지만, 먹는 것보다 퍼주는 것이 더 많다 보니 이것도 모자란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길가는 사람들을 아무나 붙잡고 나누어주는 것은 아니니 평상시 신세를 진 사람들은 물론이며, 어딘지 필요한 곳에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런 친구가 마을 이장을 맡고 있었다. 요즘 농촌에는 젊은 사람들이 부족하여 나이 50이면 아직도 어린 나이에 속했던 탓이다. 어느 이장님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마을 일이라면 만사 제켜두고 앞장서는 일꾼이었다. 자기가 일을 하다가 처리하지 못하면 이러저러하여 어렵게 되었다고 설명하면 좋으련만,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관련 있는 친구들에게 물어서라도 처리하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야유회라도 갈라치면 따로 시장을 보아 음식을 해 대던 그런 사람이 자기 손발로 농사지어 수중에 있는 것이야 오죽하였을까.
이 친구가 올 해에도 농사를 잘 지어 기쁨에 찬 수확을 하고 있었다. 황금물결 일렁이는 논에서 벼를 베고, 나락을 훑어낸 후 포대에 담아내는 일에 열중하였다. 옛날처럼 낫으로 베고 홀태로 낟알을 털던 때가 지나고 모든 일들이 기계화되었으니 일하기도 한결 쉬워졌다. 그런데 이렇게 부지런히 오가는 도중에 바지 가랑이가 그만 피대에 감기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 친구는 농촌에서 농기계로 인한 사고를 당하였는데도 농촌에서 치료를 못하고 대도시로 후송되었다. 인근의 종합병원이나 의과대학 부설병원에서도 포기할 정도의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술을 마치고 난 이 친구는 한쪽 다리만 다쳤지 다른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큰소리를 치던 사람이었다. 기왕 다친 몸을 두고 어디가 아프고 어디가 불편하며 어떤 장애가 남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비통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이야기로 대화를 주도해 나가는 성격이었다. 나는 이런 친구가 좋다.
병원에 있어보니 이제 남은 인생은 빚을 갚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하였다. 어떤 빚을 얼마나 지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주변 사람들이 전혀 그럴 일은 없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말 못할 빚이려니 추측만 할 뿐이다. 그런데 내용인즉 남은 인생은 좀 더 많은 희생과 봉사를 하여야겠다는 말이란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배추는 농사가 잘 되면 좀 더 나누어 줄 수도 있겠고, 호주머니에 있는 돈은 다 쓰면 없어서도 도와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정도의 일이라면, 정신적이나 육체적인 일을 가리지 않고 봉사하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친구가 좋다. 나를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할 것을 기대해서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친구가 있기에 아직은 사회가 따뜻하고 밝은 미래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수술이 끝나고 한 순간 자고 난 뒤에 눈을 떠 보니 가야할 길이 보이고, 그 길옆의 민초들이 보인 것이었다. 예전에 자신이 한 행동만으로도 충분하건만 아예 새로운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곳은 권력을 위한 아귀다툼의 투견장이 아니며,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이전투구의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바로 이름도 모르는 작은 들꽃이 곱게 피어 벌나비를 모으는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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