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월촌양반이었다.
올 여름에는 고추가 꽃을 피울 때만 하여도 풍년일 것이라는 말들이 무성했었다. 그러나 그 말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이 내린 비에 물러 터지고 싹이 나는 일이 벌어졌다. 한창 고추말릴 시기에 내린 비로 태양초는 애시당초 기대하기도 어렵지만, 무시로 내리는 비를 피하느라 애써 수확한 고추를 고랑에 두고 오기가 일쑤였다. 하늘이 방긋하여 방제라도 할라치면 자기도 고추라는 듯 매운 기운을 뿜어 코끝을 간지럽인다.
하루걸러 내리던 비는 날짜 계산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이 아예 들어 내놓고 내렸다. 한참을 퍼 붓다가 미안하다 싶으면 좀 잠잠하기를 열닷새나 계속한 것이다. 어차피 내릴 거라면 차라리 폭우라도 쏟아져서 고추밭을 쓸고 갔으면 가슴이나 시원 할 것을, 고추가 매달린 채 썩어가는 것도 차마 눈뜨고 못 볼일이다.
여느 해처럼 마당 가운데에 고추 건조장을 지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리지만, 햇볕이 없으니 수고하는 보람도 없다. 장마에 지치고 습기에 지치다보니 거두어야 할 식솔만큼이나 몸도 마음도 팅팅 불어있다.
그는 팔남매의 맏이며 장손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하늘 반쪽과 아는 것이라는 형제들 이름뿐이니, 농사를 지어 겨우 풀칠이나 하는 촌부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굼벵이가 구르듯 요상한 기술이 있다. 농사는 혼자 짓는데 먹을 때는 여덟이 되는 것이다. 일에 짓눌려 구부러진 손가락이 그대로 굳어버렸으면 긁어모으기나 했으련만, 오지랖은 부안 갯벌만큼이나 넓은 그였다. 사람들은 그를 월촌양반이라 불렀다. 태어 난 곳도 아니고 자란 곳도 아니건만 아내의 고향이 월촌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불렸다.
월촌댁은 구남매의 맏이며 장녀였다. 이제는 더 이상 내어 줄 것도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다 준 상태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보이지 않는 눈총을 받을 때면 여자의 자존심마저 팽개치고 희생한 그녀다. 부지런하기로 말하면 월촌댁도 지지 않았다. 새벽일이 한나절 일이며, 비 맞으며 하는 일이 하루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아낙이었다. 그러나 종달새 둥지의 뻐꾸기처럼 그녀가 먹여야 하는 입은 아홉이었다.
꽃이 피고 두물을 딸 때만 해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마다 그랬듯이 햇볕에 말리고 수건으로 닦아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조석으로 하우스를 열고 닫으며 꼭지를 따는 것쯤은 일 축에도 들지 않았다.
여름내 비구름이 도망 다니더니 결국은 장마가 지각을 하고 말았다. 건조장에 놓아 둔 고추도 무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장작불에 삼겹살 얹은 듯 뒤집어 보아도 효과가 없었다. 모든 정열과 성의를 보이고도 절반이나 버린 후에야 태양초를 포기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건조기에 넣고 돌리기는 하지만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고추를 제대로 수확하지 못해서 손해가 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렵게 수확한 고추를 제대로 건조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도 아니었다. 요즘 농촌에까지 전파된 문명의 이기는 수확의 양에 관계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확의 시기에 상관없이 꼬들꼬들한 기계초를 만들어 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1,2년 농사지은 것도 아닌데 자기가 짓고 수확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품질의 농산물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월촌양반이나 월촌댁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장마에도 태양초를 만드느냐하는 것이었다.
내가 먹을 것이며 17명의 식솔들이 먹을 것인데, 저농약 무공해 태양초를 만들지 못했다는 먹칠에 월촌부부의 마음이 상하고 있었다. 월촌양반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강한 자존심으로 버티고 서서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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