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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설은 어떤 날인가요

꿈꾸는 세상살이 2007. 12. 27. 19:59
 

우리 설은 어떤 날인가요.

 

새해 신년이 되면 신정이라 하여 매년 1월1일을 기념하고 있다. 이 신정이라는 의미는 그 전에 어떤 설날이 있었기에 그것에 비하여 새로이 정한 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그 어떤 설날이 흔히 얘기하는 구정이다. 그러나 구정이라는 단어는 신정이라는 단어에 위배된다. 오래 전 우리 조상부터 전해 내려오던 설날이 구정이라면 굳이 신정이라는 단어가 생겨나지 않았을 터이다. 풀어보면 신정을 인정하면 구정은 그냥 설날이고, 구정을 인정하면 신정은 그냥 설날이 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단(元旦)은 시단(始旦)과 같은 뜻이며, 원효라는 이름도 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중국 태종 10년 서기636년의 기록인 수서에도 신라는 정월 초하루를 명절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음력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흔히 얘기하는 구정을 쇠고 있었다는 결론이다.

 

세월이 흘러 한일합병이 된 후 1895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양력설을 쇠도록 강요 당하였다. 명분은 당시 없는 살림에 이중과세를 방지한다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단군기원의 부정과 민족혼의 말살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해방이 되었지만, 이중과세 방지와 국민의례 간소화라는 명목으로 신정의 사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것은 어쩌면 친일파들이 득세한 현실에서 과거의 잘못을 발견하지 못하는 우매함의 소산이었다고 생각된다.

 

정부의 시책과는 반대로 국민의 열망은 고조되었고, 급기야 1981년 국무회의에서 설날의 부활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찬반 투표는 가부 동수가 나왔는데 당시 의장이었던 최규하 총리의 부표로 부결되었다. 이와같이 명확한 결정을 하지 못하고 현실에 젖어있던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결국 1985년에는 구정 하루를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변경하여 달래게 된다.

그러나 차츰 국민의 정서가 안정되고, 역사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되면서 설날의 부활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드디어 1989년에 음력설을 설날이라는 명칭으로 3일간의 국경일로 정하게 된다. 양력설은 일본설, 음력설은 우리설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진 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설날이 굳이 새해의 첫날이어야 하며, 더구나 1월1일이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냥 우리가 정해 놓은 날에 우리의 민속이 행해지면 되는 것이었다. 돌아 보건데 한일합병을 부끄러운 역사라고 한다면, 해방 후에 친일파를 응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잘못 인식된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은 바로 그들의 의무가 되는 것이다.

 

원래 설은 몸을 근신하여 자제한다는 뜻과 서럽다, 또는 낯설다와 사린다는 뜻에서 전해졌다고 믿는다. 당시 계절적 환경으로 보아 채 녹지 않은 눈밭에서 혹은 아직도 내리고 있는 눈길에서도 의연해야 한다는 것 또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새로 시작하는 첫날이므로 모든 일에 신중히 생각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다보니 새로 장만한 음식에 새로 장만한 옷을 입는 것도 당연한 일이며, 새 행장을 꾸린 사람의 행동이 부자유스러운 것도 불문가지였을 일이다.

 

내 어릴 적 설은 매우 추운 날이었다. 작은 문고리에 살갗이 척척 들어붙는 어설픈 날이었다. 하얀 모자를 눌러 쓴 지붕의 처마 끝에는 한 자도 넘는 고드름이 늘어졌고, 낙숫물은 쉬임없이 떨어져서 마당을 적셔댔다. 부지런한 사람은 마당을 돌아나가는 작은 고랑을 파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여 먼지가 나지도 않는 마당을 쓸고 또 쓸어 검불하나 없게 하였다. 마당을 가로 지르는 빨랫줄도 걷었다. 펄렁이는 문풍지도 손을 보고, 삐걱거리는 문짝에도 손을 댔다. 정지가득 장작이며 짚단을 쌓아놓고, 묻어 놓은 물 항아리에 물도 채워 놓았다.

한두 마리 키우는 우리 안에 볏짚이며 풀을 넣어 냉기를 막아주기도 하였다. 구석구석 놓았던 쥐약을 치우고, 쥐덫도 치웠다. 앞마당에 메어 놓았던 개를 뒷마당으로 옮기는 것은 설날 아침 동참하는 선영에 대한 배려였다. 심지어 설 며칠 전부터는 상가에도 참석하지 않는 등 근신하는 것이 역력하였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의 설을 맞는 준비에는 빈틈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신경을 쓰고, 모든 곳을 풍성하게 하였던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지만, 설날도 이에 못지않는 풍성함이 있었다. 음력설에서 양력설로, 다시 음력설로 바뀌면서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였지만 설날은 제 본분을 잃지 않았다. 지금까지 제자리를 꿋꿋하게 지켜 오면서 이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설날은 우리의 좋은 풍습이며 계속하여 지켜 나가야 할 양속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