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이루지 못한 백제의 꿈이 숨쉬는 곳 - 익산

꿈꾸는 세상살이 2008. 1. 20. 22:00

전라북도의 문화적 토대는 단연 백제계이다. 그중에서도 익산은 마한,백제 문화권의 중심을 이룬다. 익산에는 잃어버린 백제사의 한 모서리를 받쳐줄 많은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여 오늘이라도 자신들이 간직한 내력을 밝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리적 위치

익산은 전라북도의 북서부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금강 하류를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의 부여군과 논산시에 맞닿아 있으며, 남으로는 만경강을 끼고 전라북도 김제시와 닿아있다.

사방이 평야로 둘러싸여 드나들기가 편리한 까닭에 예나 지금이나 전라도로 들어서는 초입이 된다. 호남선이나 전라선 열차를 타면 충청남도의 강경을 지나 익산땅에 들어서고, 호남고속도로를 통하더라도 충청남도의 논산을 지나 익산시 여산면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동남쪽으로는 김제평야, 서남쪽으로는 군산시의 옥구평야, 서북쪽으로는 논산평야와 닿아 있는 익산땅은 쌀 생산량이 김제시에 버금간다. 뿐만 아니라 금강과 만경강 덕분에 수로교통이 편리하여 신석기 시대이래로 농경문화가 번창하였고, 삼한 시대로부터 여러 시대에 걸쳐 인근 지역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역사적 문화도시로서의 의미

(한 개의 문화 유적이 아닌 문화 유적지구로서의 의미)

익산땅에서도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곳은 오늘날의 금마면과 왕궁면을 포괄하는 옛 금마지역이다. 일찍이 삼한 시대에 기자의 41대 손인 기준은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통하여 남으로 내려 오다가 금마땅에 이르러 마한의 왕이 되었다. 이것이 마한 54개 소국 가운데 건마국이었다.

그 후 백제의 시조 온조는 마한을 병합하여 이곳을 금마저로 불렀다.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던 서기 600년 무렵, 백제의 무왕은 금마저를 도성으로 삼고, 미륵사와 제석사 같은 거대 사찰을 지었으며 왕궁평성을 축조하였다. 이를 근거로 백제가 금마지역으로 천도하려 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나, 또 한편으로는 사비성과 웅진성, 그리고 이곳을 달리 지정한 별개의 도시로 하여 운영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백제가 망한 뒤 승전국에 의해 패망한 그 역사의 기록이 철저히 인멸되었고, 남아있는 기록조차 단편적인 까닭에 사료를 통해서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가 없다. 그러나 근래의 발굴 결과에 따라 백제 중기 이래로 이 지역이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 문화의 또 다른 중심지였음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미루어 볼때 근세에 우리가 당한 일제의 억압 과정에서 겪었을 역사적 오류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통일 신라 문무왕때는 이곳에 고구려 유민 안승의 보덕국이 있었으며, 후삼국 시대에는 후백제의 왕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과 치열한 싸움을 벌일 정도로 세력을 펼쳤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금마에는 마한과 백제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주변에 익산토성, 미륵산성, 낭산산성, 왕궁평성 등 고대 국가의 성터들이 흩어져 있다. 또 미륵사 터, 왕궁리 오층석탑, 쌍릉, 동고도리 석불입상, 태봉사 삼존석불, 연동리 석불좌상 등 유물과 유적이 밀집되어 있어 이곳에 터를 닦고 경륜을 펴려 하였던 옛 선인들의 자취를 증언해 주고 있다.

이처럼 한 지역에 유적과 유물이 밀집된 것은 경주, 부여 등 왕도에서나 볼 수 있는 일로, 이 지역이 당시 왕도에 준하는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것임이 반증된다.

 

익산의 현재문화

한편 오늘날의 익산에는 호남평야의 중심지로서 오랜 옛날부터 풍부한 농경문화를 일구어 오는 가운데 농민들이 불러온 민요와 농요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전승되고 있는 지게 작대기를 두드려 장단을 치며 부르는 익산 목발노래가 유명하다. 농경문화와 연관된 민속놀이로 마한 때부터 솟대 행사에서 유래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기세배놀이도 있다. 

여느 농촌과 별 차이가 없이 한산하고 약간은 낙후된 듯한 오늘의 익산 모습이다. 하지만 그 옛날 이곳에 펼쳐졌던 포부와 영화의 흔적들을 되짚어 보노라면 새삼 옛날과 오늘의 대비가 주는 엷은 아쉬움에 싸이기도 한다.  

익산 지역을 오가면 곳곳에서 화강석을 가공하여 놓은 석물공장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빛깔이 곱고 단단하며 철분 함유량이 적어 오래토록 색이 변하지 않는 황등의 화강석은 유명하다. 또한 그것을 가공하는 기술역시 뛰어나다. 굳이 이 지역 석공예의 연원을 찾자면 저 유명한 백제의 석공 아사달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여산면의 원수리 진사동에는 국문학자이자 시조 시인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가 있다. 1번 국도를 지나가면서 보이는 이 집은 지금도 선비 집의 아담한 정취와 선생의 체취를 전해주고 있다.

 

미륵사터

금마에서 함열쪽을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퍼진 삼각형 모양의 산이 있다. 산맥으로 이어지지 않고 홀로 외로이 서 있는 금마의 진산 미륵산이다. 예전 백제시대에는 용화산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 산의 남쪽자락 끝에 질펀하게 펼쳐진 너른 벌판이 있고,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인 미륵사터가 있다. 동서 방향으로 172미터, 남북으로 148미터에 이르는 절터는 석탑이 있다. 반쯤 잘라져 나간 채 서쪽에 서 있는 서탑, 1993년에 복원된 동탑, 당간지주 2기, 목탑터, 금당터 3곳, 회랑과 강당의 승방 자취, 그리고 남문과 중문의 흔적도 남아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때 창건되었으며, 고려때까지도 성황하였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 폐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

금마 네거리에서 전주방향으로 1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바로 곁에서 보이는 석탑이다. 미륵산에서 남으로 이어지던 산자락이 끝나고 낮은 구릉의 능선위로 탑의 윗 부분이 살짝 보이는 정도다.  이 탑이 왕궁리 오층석탑이며, 이 일대가 구릉지대로 예로부터 마한 또는 백제의 궁궐터였다고 전해오는 왕궁평(王宮坪)이다. 이곳의 지명도 왕궁리(王宮里)로 궁궐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이 왕궁평의 야트막한 언덕 위 탁 트인 곳에 탑이 있다. 비바람에 시달려도 석달 열흘동안 고운 꽃빛을 간직한다는 배롱나무가 가득한 그 속에서 손짓하듯 서 있는 탑이다. 탑의 높이가 8.5미터이고, 기단 면석에는 2개의 탱주를 갖추었다. 1965년 해체 복원시 1층의 옥개석과 기단부에서 19매의 금제 금강경과 금제 사리함, 사리병 등의 사리장엄구가 수습되어져 국보 제 123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것들은 현재 국립 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1976년 이 탑 주변 발굴공사에서 관궁사(官宮寺)라고 적혀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사찰의 이름이 밝혀졌었다.

 

익산 쌍릉

백제 30대 왕인 무왕과 그의 아내인 선화공주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데, 7세기 백제 말기의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다.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이 무덤은 사적 제 87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 개의 봉분이 서로 거리를 두고 있어 쌍릉이라 불리는데, 좀 더 큰 것은 대왕묘, 작은 것은 소왕묘라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말통대왕릉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말통이라 함은 맛동 즉 서동의 의미이다. 1917년 발굴과정에서 백제 말기의 왕릉 형태를 갖춘 고분임이 밝혀져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가람 이병기 생가

여산면 진사동에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가 있다. 마을 입구의 10여 채 민가를 지나고 산자락에 닿을즘 길이 끝을 보인다. 1891년 변호사를 하던 이 채의 장남으로 태어나 소년 시절을 지냈고, 1968년 세상을 떠나기 전 다시 생가로 돌아와 오랜 병고끝에 77세로 생을 마감한 곳이다. 가람은 우리말과 글을 가다듬는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탁월한 국문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시조문학 부흥에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현대 시조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또한 고고한 선비정신으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보이는 애국심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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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푸른 전북 21 /2004년 3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