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토요일
남쪽으로 난 창이 훤하다. 평상시 날이 새기도 전에 일어나던 것에 비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시각이다. 밖이 훤하니 더 이상 미적거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못해 일어났으나 여느 때보다 한 시간이나 늦은 아침을 먹고 말았다. 아침에 한 시간이 늦으면 낮에 두세 시간은 잃을 것이 뻔하다. 세상에 이런 이치를 모를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늦장을 부리고 만 것이다.
온몸이 뻐근하고 무겁다. 마치 운동회를 하고난 다음날처럼 몸 따로 마음 따로다. 아마도 긴장이 풀어진 때문일 듯하다. 토요일마다 쉬는 직장도 아닌데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최근 들어 몸이 급격히 피로할 정도의 고된 노동을 한 것도 아니건만 피로가 쌓였었나 보다. 그렇다고 이리저리 바쁘게 쏘다닌 것도 아니었는데 마음만 급하고 몸만 피곤한 결과가 되었나보다.
그래, 바빠야 한다고 하더니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좋은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바쁘면 바쁜 대로, 안 바빠도 바쁜척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이런 나에게 지금 가장 바쁜 것은 아마도 마음의 정리일 듯싶다.
나는 요즘 나쁜 버릇이 하나 더 생겼다. 저녁밥을 먹고 난 뒤에 간식을 먹는 일이 일상화된 것이다. 그렇다고 시간을 맞춰놓고 밤참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뭐든 먹어야 하루를 마무리하는 버릇이 되고 말았다.
병실에는 일상생활 중 발생한 사고로 인한 노인들만 계신다. 어느 병원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노인들께서는 더욱 더 사람을 그리워하신다. 이거 좀 먹어라, 저거 좀 먹어봐라, 이거라도 마셔라 주문은 끝이 없다.
뭐라도 사 들고 가서 드리고 와야 하겠지만, 하루 종일 누워계신 분이 잡수시면 무얼 얼마나 드시겠다고 묵혔다가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다가 누워만 있으니 소화도 안 되는데 내 대신 네가 먹어야 한다고 성화시다. 배가 불러도 한 입 먹어야 하고, 먹기 싫어도 한 입 베어야 하루가 마무리 되고 있다. 얼굴에는 거짓 미소를 짓고, 맛있는 척하며 음식을 먹어본다. 하루 종일 누워있어 걷지도 못하는 환자를 위한 음식이 내 입에 맞을 리 없건마는 애써 기쁜 표정을 지어본다.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다가 체할지도 모를 불안감 속에서도 태연한 척하며 내색을 할 수가 없다.
작고 좁은 병실안의 하루가 얼마나 복잡하고 일이 많은지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세상의 모든 근심사를 모아다 병실에 쏟아 놓은 듯하다. 눈발이 비치더니 그나마 그쳐서 다행이라느니, 겨울은 추워야 하는데 너무 따뜻한 것 아니냐는 걱정도 줄을 잇는다.
예전에 물 말아서라도 억지로 먹이던 그런 마음이 일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더 오래 전 자신은 굶어도 자식은 먹여야 하던 시절이 생각났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의 먹는 순서는 항상 정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누구 차례인지 생각할 것도 없이 이미 정해진 순서만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어머니의 가슴 속 먹는 순서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많은 음식이 있어도 배불리 먹는 자식을 보아야만 먹은 것이요, 손에 무엇을 들고 있어야만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다 늦은 저녁에 꼭 밤참을 먹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곱씹어 본다. 내가 밤마다 이렇게 먹어대면 환자가 빨리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물이 낮은 데로 흘러내리듯, 어버이의 사랑도 흘러내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물을 받아서 다시 높은 데로 길어 나르고 있는 중이다. 순전히 나를 위하여,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하여 높은 곳에 자꾸만 물을 퍼 올리고 있는 중이다.
다른 사람들이 주말에 훌훌 털고 자리를 떠나듯 나에게도 그런 주말이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한 주를 위하여 재충전을 하듯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주중에 긴장되었던 육체를 내려놓고, 유연하게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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