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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에 다는 태극기

꿈꾸는 세상살이 2009. 3. 19. 21:00

삼일절에 다는 태극기


3월 1일, 삼일절에 다는 태극기는 어떤 태극기일까

생각해보면 요즈음 극장가에서 번지고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 처럼 피에 묻은 태극기일 것 같다. 아니면 슬픔의 눈물이 젖어 있는 무거운 태극기일 것도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일절에 태극기를 내다 거는 것을 꺼려하는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하며 살펴본 올해 삼일절 아침에는 태극기를 게양한 가정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어림잡아 채 절반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어느 지역에서는 모든 주민들을 대상으로 삼일절에 태극기를 반드시 게양하자고 홍보하여 좋은 실적을 거두었다는 곳도 있다. 이렇게 홍보하고, 분위기를 만들어서, 이번에는 꼭 국기를 게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여야만 태극기를 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자신이 생각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싶으면 게양하고, 게양하고 싶지 않으면 게양하지 않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많은 국민들이 선택하여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좋은 현상일 것이다. 태극기를 다는 것은, 속으로는 어떤지 모르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삼일절의 의미를 잊지 않고 있다는 표시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일절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에 있던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의 독립을 요구하며 세계만방에 알리던 일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3월 1일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의미로 1948년에 제정한 국가 4대 국경일 중의 하나이다.

삼일운동은 온 국민들이 각 처에서 동참하였고, 특히 지도층 인사 33인이 대표가 되었다.

이들은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최린 등이며 유관순은 포함되지 않았다.

역사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그때마다 고쳐 쓰여 진다는 말도 있다. 유관순은 당시 16세 소녀였으며 학생이었다. 그리고 삼일운동을 주창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3월1일 당일에 실로 감격적인 실천으로 옮긴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가 삼일절이면 떠올리는 사람은 이 33인중 어느 누가 아닌, 나름대로의 명분과 사명감의 지도자층에 들지도 못한 나이 어린 학생 유관순인 것에 주목해야 한다.

 

1902년생, 고흥 유씨,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 딸인 관순은 천안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에 다니다가, 1919년 고등과 1년의 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 여린 관순이 당시 쟁쟁하던 민족의 대표를 물리치고, 항상 되뇌이는 이름으로 남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관순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옥에 갇혔고, 재판받는 도중에도 법정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형량이 더욱 무거워졌고, 결국 고문을 견디지 못한 채 1920년 17세로 죽어간 것은 여러 독립투사들과 유사하다.

그때는 석방 2일을 남겨 놓은 상태였었는데, 당시 병들고 상처 난 몸으로는 석방되었어도 오래 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장사지내려고 신병을 요구한 이화학당 교장에 의해 밝혀진 시신은 토막 난 상태였다고 한다. 이처럼 강한 고문을 견디고 살아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 뒤 관순은 한참 지난 1962년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 받았다.

 

반대로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말로만, 붓으로만 독립운동을 한 경우도 있는 듯하다. 최근에 이 민족대표자들 중에서도 친일 행적이 들어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역사는 그 순간마다 다시 쓰여진다는 말처럼, 관순은 죽었으나 33인은 살아있는 동안에 진정 우리의 지도자가 33인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 일부 인사는 지조를 지키지 못했고, 환경의 영향을 받아 변절자로 살아간 자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33인을 다시 돌아보고 옥석을 가려 보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에 비하면 이름없이, 대가없이, 더 많은 고통을 당하고, 더 많은 교훈을 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고 싶을 뿐이다.

 

해마다 국경일이면 태극기를 제작하여 무료로 보급해온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10여 년에 걸쳐 대형 태극기를 약 21,000여 개나 보급하였다. 이 사람은 국경일에 태극기를 달지 않는 것은, 선량한 우리 국민들이 아마도 태극기가 없어서 게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시작하였다고 했다.

 

매년 삼일절이 되면 불법 오토바이 개조자들도 이 날에는 태극기를 달고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 그 행동 자체야 잘못된 것이지만 태극기를 다는 행동은 그냥 보아 줄만 하다. 이들이 비록 태극기 다는 것을 핑계로 도심에서 폭주를 일삼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들을 이 정도로 약하게 비난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지난번에는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외국에서 군 사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차에 달려 있는 태극기는 잘못 된 국기였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잘 알아보지도 못했겠지만, 우리는 눈을 감아도 아련히 떠오르는 태극기가 진정 맞는지 의심이 갔었다.

또한 외국에 파병하는 부대의 표식 중 태극기가 잘못 그려진 적도 있었다. 출국 전에 바로 잡아야 한다고 시정하였지만,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있는 것 같아 서운하다. 심지어 대통령이 들고 응원하던 태극기가 잘못된 문양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지도자와 국군, 그리고 그와 함께 걸려있는 국기는 진정한 한 국가의 대표이다.

 

우리는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우리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요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지난 삼일절에는 관순이 삼일운동을 하기 전인 1918년 3월 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을 공개했다. 실로 85년만의 일이다.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 이 사진의 인물을 확인하는 데 무려 85년이나 걸렸다는 점이다. 아마도 당시에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현존해 있을 때에는 미처 몰라보다가, 그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나니 이제야 사진 판독이 가능해졌다는 것 같은 인상은 어딘지 슬픈 태극기를 연상시킨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조선총독부 관보에 기록된 석방 2일 전의 유관순 옥사 사실이나, 일본에 충성한 조선인 명단 등도 그것들을 발견, 확인하는데 85년이 걸린 것이다. 이래서 우리의 역사가 유구한 것인가, 아니면 5000년 역사에서 85년은 너무나 짧은 기간이라서 별 의미가 없는 것일까.

 

현재의 우리 땅에는 모든 국민들이 친일파라서, 그 전부터 알고는 있었어도 미처 발표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국가의 보훈처가 있고, 광복회가 있고, 민족문제연구소도 있는데 속 시원히 밝혀내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말 역사는 그때그때에 맞게 고쳐 쓰여 진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이제야 국회의원들이 친일 반민족행위를 진상규명하고, 역사왜곡 시정운동, 독립운동 계승사업을 해 나가자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을 결성하고 있는데, 아직도 그 뚜렷한 결과는 없다. 이것도 자신의 친족 중에 친일명단으로 소개되어 있는 부분 때문에, 포괄적이고 거의 제재되지 않을 정도의 조항을 넣었다는 소문도 있다.

 

각 지역에서도 일부 지역의 역사를 쓰면서 년대별로 국가를 위한 부분과, 국가에 해를 끼친 부분을 적고 있다. 그런데 국가에 해를 끼친 부분의 역사는 1년치 기록이 반 페이지 분량에 그치고 있다. 그만큼 들어 내놓고 평가하지 못하니 잘 못한 것을 숨기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것들은 글자 그대로 소문에 지나지 않기를 바란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크고 작은 문제들이 항상 널려 있지만, 국가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그야말로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우리 국민들은 자신보다는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음을 자랑스러워하는 민족이다. 이러한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 희생하며 치른 대가를 그대로 돌려 갚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자부심을 인정하고 존경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위안부문제가 그렇고 징용문제가 그렇다. 아울러 독립운동의 희생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을 하루 속히 덜어 주는 것은 진상을 규명하여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대의 후손들이 하여야 할 역사적 소명이다.

 

남의 나라에서 한 장 던져주는 우리 역사의 과거 사료를 가지고 우리가 일희일비한다면 그야말로 주권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주는 사료보다, 한 발 앞서서 우리가 직접 찾아낸 사료를 가지고 당당히 역사를 밝혀야 할 것이다. 이것이 현세에 쓰는 역사 다시 쓰기일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국경일이 되면 내가 달던 태극기도 올해부터는 자식들이 달도록 시키고 있다. 자식들이 기쁜 마음으로 달든, 아니면 귀찮으면서 어쩔 수 없이 달든 상관없이, 태극기를 게양하는 마음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라고 믿는다.

그래서 삼일절에 다는 태극기는 나라를 사랑하는 태극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