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가 될 사람이라면
아내는 텔레비전의 연속극을 좋아한다. 그러나 교양 강좌나 도전 골든벨, 우리말 겨루기 등과 같은 프로그램을 앞선 우선순위에 놓는 양면성도 보여준다.
어제는 아침 프로에서 어느 강사가 말하기를, 유명한 부자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자식에게는 단 1실링을 남기는 유언을 하였단다. 남과 경쟁하면서 앞서갈 수 있는 여건을 자식에게 많은 돈을 줌으로써 만들지는 않겠다는 얘기다. 혹시나 실패를 하고 조금 늦게 성공하더라도, 자신의 노력으로 일어서야만 경제의 중요성을 알고 사회성을 배운다는 관점에서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어느 누가 생각해도 공감이 가는 말이다. 더 따지고 들면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얘기도 된다.
우리는 점잖은 곳에 가면 흔히들 고상한 척 말한다. 식당에서는 아이들이 식탁사이를 뛰어다니며 놀아서는 안 되며, 열차 통로에서 달리기를 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병원에서 손님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일일이 간섭해서도 안 되고,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떼를 쓰거나 방해를 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도로는 횡단보도로 건너야 하며, 아무데나 오물을 버려서도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때와 장소에 따라 지켜야할 예절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다. 한 구성원으로서 소속감도 가지고, 자신의 위치에 따른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내 자식의 행동으로 부딪치면 너무나 관대해진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바쁘다보니 어쩌다 한 번 그랬겠지.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덮어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말이지 세상을 살다보면 어쩌다 실수로, 아니면 여러 정황상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쩌다 한 번이라는 그 행동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거나, 우리가 알고 있는 예절은 어쩌다 한 번 지켜진다는 데 있다.
요즘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음에 대하여 지적하는 일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든 지적하고 알려주려 애쓰던 일도, 이제는 체념하는 쪽에 줄을 서고 있는 것이다. 내 자식은 내가 가르친다는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알아서 한다는 데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라보는 가슴은 답답하기만 하다.
저 아이가 커서 돈을 많이 벌었다면, 남의 눈에 피눈물 내지 않고 좋게 벌었을까. 저 아이가 커서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면, 야합을 하지 않았을까, 없는 말을 꾸며내서 지지를 얻지는 않았을까. 저 아이가 커서 교육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면, 논문 표절이나 실적 가로채기는 없었을까 생각하니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지도자는 자신의 일신에 적용하는 말이 아니다. 자기 혼자서 지도를 주고받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도자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개인보다 구성원을 위하는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좋은 지도자는 누가 보아도 이해가 되는 행동을 해야 하며, 내가 좋자고 남을 억압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지도자는 패망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아니며, 불안과 공포로 안내하는 사람도 아니다. 지도자는 칭찬과 용기로 북돋우고, 사랑과 희망의 길을 터주는 사람이다. 내 자식이 장차 사회의 지도자가 되기 원한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스스로 반문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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