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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삶

꿈꾸는 세상살이 2009. 3. 19. 21:01

향기나는 삶


몇 년 전에 소록도에서 봉사하다 떠난 외국인 간호사가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간호학교를 나온 마리안네 스퇴거, 마가레트 피사렉 두 수녀의 이야기다. 둘은 멀고 먼 한국의 소록도 한센환자 병원에서 간호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고, 1962년 그리고 1966년에 입국한 분들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희생과 봉사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 후 40여 년이 넘도록 섬을 떠나지 않았고, 지극정성으로 환자들 간호에만 신경을 써왔다. 환자들에게는 정성이 최고의 약이라며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상처를 살피고 약을 발라주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이국에서 더군다나 누구나 꺼려하는  한센병을 고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로지 사랑과 정성만이 그러한 벽을 허물고 하나 되게 하였을 것이니 그들의 진심이 전해진다.

 

숨어서 행하는 사랑의 손길은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그 마음이 세상 밖으로 퍼져나갔다. 오전 진료가 끝나면 오후에는 마을을 돌며 각 가정을 보살피고 위로해주는, 혹시 눈에 보인다면 그야말로 천사의 길이 그러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녀들이 소록도를 떠났고, 주민들은 그 뒤로 열흘이 넘도록 두 사람을 위한 기도로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이제는 나이가 70을 넘어 더 이상 환자들 돌보기가 힘겨운데다가. 오히려 짐이 되면 안 된다고 새벽에 소문없이 떠난 수녀님이었다. 그들이 남겨놓은 편지에는 부족한 외국인이 여기에 와서 큰 사랑을 받았다고 오히려 감사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섬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떠난 할매를 그리워하며 장도를 빌고 또 빌었다. 섬에서 맞은 환갑 때에도 기도하러 간다면서 자리를 피했고, 오스트리아에서 주는 훈장도 거부하는 바람에 주한 대사가 현지까지 직접 방문하여 전달하였다고 한다. 4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말은 물론 한글까지 익히게 되어 이제는 확실한 전라도 할매가 되었고, 일손을 놓고 쉬어야 할 때에 그들 곁을 떠난 것이다.

 

어느 날 아들은 소록도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비록 수녀님은 떠났지만 작은 사슴을 닮았다는 소록도, 몸은 비록 얼룩이 졌지만 눈은 사슴처럼 맑아 영롱한 사람들, 영혼은 사슴처럼 순박하고 아름다운 그것이 바로 소록도의 모습이었단다. 전에는 배를 타고 다니던 섬이, 이제는 차를 타고 가는 마을이 되었다. 교통이 발달하여 거리가 단축된 것도 있겠지만, 이제는 굳이 격리할 필요가 없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도 내포되었을 것이다.

 

돌아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헤어지는 가슴이 아프다며 몰래 떠난 수녀님의 손에는, 처음 들고 왔던 40년도 넘은 구닥다리 가방이 들려있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할 일 많은 자기 주인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선한 자기 주인을 보면서, 자신에게도 할 일을 달라고 하던 가방은 그렇게 처음과 나중에 동행하는 일꾼이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는 상대방을 섬기는 낮은 자라는 신념으로, 주인을 기다리던 낡은 가방이나 평생 봉사하며 살아온 수녀님이나 같은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