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동교회 구본당(杜洞敎會 舊本堂)
전북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385-1번지에 오래된 ㄱ자 한옥교회가 있다. 지금은 예배를 보기 위한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지만, 두동교회의 옛 본당인 한식목조건물을 포함하여 1,993m²에 대하여 2002년 4월 6일 문화재자료 제179호로 지정하였다.
이곳 성당면의 기독교는 1923년 해리슨 선교사와 김정복이 복음을 전하면서 부인들이 먼저 믿기 시작하였는데, 그 수가 점차 늘어나서 부곡교회는 대부흥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박재신은 성당면 두동리 436번지의 자기 집 사랑채를 빌려주어 예배를 보도록 하였다.
성당면 부곡리의 부곡교회가 함라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음에도 교인들이 계속하여 늘어나자, 전북노회는 또 다시 부곡교회의 분할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3년 이종규성도가 헌납한 100여 평의 부지에 두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ㄱ자 교회는 김제의 금산교회와 익산의 두동교회가 있는데, 금산교회의 건축은 1908년으로 두동교회보다 조금 앞서있다.
두동교회는 교회를 세울 당시 목재를 구하는 중에 안면도에서 나무를 실은 배가 풍랑을 만나 파선되었고, 그 나무들이 때맞춰 성당포구까지 떠밀려 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들을 손쉽게 사들여 교회를 지으니 1929년에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설립초기에는 박재신씨와 부인 김씨, 월남 이상재선생의 자부이며 박재신씨의 고모인 박씨, 임현숙씨 등이 구연직 전도사를 모시고 박재신씨 집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다. 구연직 전도사는 훗날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여성신도들이 많아서 또 다른 여성에 대한 전도가 쉬웠고, 신현숙, 신영애, 박재신씨의 숙모인 김정숙, 황희만 장로의 딸인 황정옥, 황윤애 등이 기록에 남아있다.
두동교회도 당시의 유교풍습을 반영하여 ㄱ자형의 한옥으로 지어졌다. 지붕은 홑처마에 우진각 형태로 양철지붕을 사용하였다. 예배당 안은 천정이 없는 통건물이며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남녀 회중석은 각각 3칸의 크기이며, 내부는 하나로 툭 터진 칸로 되어있다. 전면에서 볼 때 ㄱ자형 평면에서 남북으로는 남자석, 동서로는 여자석이다. 설교를 하는 강대상(講臺床)에서 오른 쪽은 남자석, 왼쪽은 여자석으로 구분되었다. 또 각각의 박공면에 출입문을 둔 것은 남녀유별의 유교적 풍습에 따라 출입하는 동선(動線)을 분리한 것이다.
내부 바닥은 장마루가 깔려있으며, 강단은 마루와 38cm의 높이차를 두고 있다. 강단의 전면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하고 그 중앙에 강대상을 놓았다. 강대상 전면에는 내부 서까래를 받치는 내진(內陣) 기둥 하나가 세워져있는데, 다른 기둥은 모두 4각형기둥을 사용한 것과 달리 이 기둥만 8각형이다. 이 기둥은 구조적으로 회첨부를 받치는 기능을 하면서, 8각주와 모서리 기둥 사이에 휘장(揮帳)을 둘러 예배시에는 남녀가 서로 볼 수 없도록 하는 역할도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5량이고 남자석 종도리 밑의 상량문에는 1929년 5월 14일에 상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외벽은 중방을 지르고 칸마다 미서기 유리창을 달아 채광을 얻음으로써 내부는 밝은 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창틀 목재가 뒤틀린 부분도 있어 창문이 잘 열리지 않는 곳도 있다. 물론 지금은 새로 지은 본당을 사용함으로 창문으로 인한 불편함은 없다.
두동교회는 바로 옆에다가 1964년 5월 벽돌조로 72평의 새로운 본당을 짓고, 1991년 4월 13일 교육관 40평, 2005년 11월27일 선교교육관 150여 평을 지었다. 2007년 5월 4일에는 예전의 종각도 복원하였다. 종각의 굵은 나무는 기계대패로 마감한 것이 좀 그렇다쳐도 대체적인 분위기는 고풍스럽다.
최근인 1982년 11월 26일에는 두동교회에서 성광교회가 분리되어 나가기도 하였다. 초대 구연직전도사를 비롯하여, 황희섭조사, 최의종전도사, 송준면전도사, 이병열목사, 현취오목사, 송병화목사, 김종근목사, 안대옥목사, 이진행목사, 김탁모목사를 거쳐 현재는 2003년 6월 29일부터 이정완목사가 시무중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설립된지 100년이 넘는 교회도 어느덧 400여개가 넘는다. 그러나 알려진 기독교성지는 여기여기라고 법으로 정해진 곳이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성지요, 종교적으로 연관이 깊은 곳이 바로 성지라고 생각한다.
대체적으로 알려진 국내 성지로는 마포합정동의 양화진선교기념관과 외인선교사묘지, 구례산동면의 좌사리 지리산노고단선교유적지, 여수남면 금오도의 우학리교회, 화성발안의 제암리교회, 천안병천의 유관순생가와 매봉교회, 정읍소성의 애당리 두암교회, 김제금산의 금산ㄱ자교회, 순천시 매곡동의 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 영광염산의 염산교회, 영광염산의 야월교회, 여수율촌의 신풍리애양원, 강화양사면의 교산교회,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성공회강화읍교회, 옹진군 백령면 백령도, 고흥군 도양읍의 소록도, 인천서구 왕길동의 소래교회, 군산구암의 구암교회, 영암군서의 구림교회, 논산성동의 개척리 병촌교회, 진해성내의 웅천교회, 제주아라의 제주성안교회, 전주다가동의 서문교회, 광주퇴촌 우산리의 천진암, 안성양성의 미산리미리내성지, 서산해미면의 읍내리 생매장순교지, 용인양지의 추계리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강화읍의 관청리강화성당, 서울마포 합정동의 절두산순교지, 서울종로 연건동의 광혜원 등을 들 수 있다. 나는 여기에 익산시 성당면의 두동교회를 포함시키고 싶다.
김제의 금산교회는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데, 우리 지역의 두동교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성당면 두동리는 지리적으로 외진 곳에 위치하여 인적이 드문 전형적인 시골이다. 이런 곳에서 그토록 많은 신자들이 성황을 이루었다니 참으로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뱃길이 열렸을 때에는, 금강을 따라 포구가 있던 성당이 제법 유명한 마을이었을 것도 확실하다.
두동교회의 전체적인 배치는 현재 건물을 보아 사랑채가 안채보다 큰 것이 조금은 안쓰럽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에 지었던 두동교회 구본당은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새로 지은 본당과 그 뒤에 지은 교육관이 갈수록 대형화된 점은 필요에 의해서 추가로 지은 것임을 알려준다.
한창 농사일에 바쁜 평일 오후, 일부러 문화재를 찾아 갔건만 두동교회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통의 시골교회처럼 비록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교회라지만 인기척이 없다고 하여 닫힌 문을 일부러 열고 들어갈 처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어서 이리저리 겉모습만 훑어보고 사진을 찍는데 사람이 돌아왔다. 주인없는 집을 서성거린 미안함에 고개를 숙이니 오히려 잘 왔다고 반긴다. 남의 집을 기웃거렸다고 핀잔을 받을까 걱정했었는데, 오히려 잠겨있던 문을 열어주며 들어가서 보라고 권한다. 첫눈에 들어오는 분위기는 어느 대형교회 못지않았고, 내부도 방금지은 신축교회 못지않게 깔끔하고 아담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2009년 5월 17일에 ㄱ자 교회의 건축 80주년기념예배를 본 흔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역사 80년을 가진 교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시내에도 100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들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이들이 특정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된 경우는 드물어서 서운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도 한국의 기독교역사 194년에 비하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두동교회가 가지는 남다른 의미는 초기 건축물의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며,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유교사상을 일거에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종교 속에 포용하였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전국에 단 두 곳에서 그런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음이 가치성, 희귀성에서 중요하다면 중요하다 하겠다.
지금은 비록 외진 곳이지만, 예전에는 수로를 통한 통행이 빈번하였고, 성당창을 통한 사람들의 래왕도 잦았을 것이기에 현실과 격세지감을 느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은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내려주는 듯 따갑게 쪼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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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09.10.21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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