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숲정이 성지(礪山숲정이 聖地)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295번지에 숲정이성지가 있다. 이땅에 천주교가 들어오고 이를 믿던 신자들에게 박해를 가한 곳이다. 이는 천주교재단의 소유로 2007년 10월 시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의 천주교성지는 전주교구 제2의 성지로 불린다. 박해당시 숲이 우거진 곳이라 하여 숲정이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천주교전주성지도 전주숲정이성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당시 여산부에 속하는 고산, 금산, 진산 등의 천주교 신자들이 여산 관아로 잡혀와 형벌을 받았다. 이들은 심산유곡에 숨어있었지만 모두 잡혀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숲정이 성지에서는 주로 목을 졸라 죽이는 교살형(絞殺刑)을 썼고, 때로는 번뜩이는 칼로 목을 베는 참수형(斬首刑)을 썼다고도 한다. 이때 순교한 숫자는 기록상에 22명이나 되며, 미기록자를 합하면 그 수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이때 순교자 중에서 특이할 사항은 대아리 댐 수몰지역의 진리에 살던 당시 62세인 토마스 김성첨의 가족이 6명이나 포함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옥에 갇혀있는 동안 심한 굶주림에 시달렸던 교우들이 사형집행장의 풀밭에 나오자마자 정신없이 풀을 뜯어먹었다는 목격담이 전한다. 이때 김성첨 토마스 형제는 온갖 고문과 굶주림을 시달리는 교우들에게 ‘우리가 이때를 기다려왔으니 천당진복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이만한 괴로움도 이겨내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 받자.’ 하며 그 가족과 마을사람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들이 순교당한 후 인근에 있던 미나리꽝에 버려진 것을 눈여겨보았다가 야밤에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 결과 겨울옷인 솜옷에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이는 신도들이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면(綿)옷의 솜을 먹어버렸다고 전해오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들 주검을 몰래 수습하여 천호산 기슭의 동남쪽 언덕에 묻어두었다. 이곳은 박해 당시 천호공소가 있던 곳이며 박해를 받은 신도의 가족친지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1983년에 이들 시신 발굴작업이 시작되면서 천호성지피정의 집이 건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피정의 집은 천주교 봉동성당의 관할이지만 익산시 여산성지와 더 가까운 인연을 갖게 된 것이다.
천주교 박해 당시에 또 하나의 처형 방법으로 백지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여산동헌의 마당에 굵은 말뚝을 박고, 그 말뚝에 신자들의 손을 묶은 뒤 상투를 풀어 뒤로 당겨서 손에 묶었다. 그리하여 고개가 저절로 하늘을 향하게 되면 그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한지(韓紙)인 백지(白紙)를 여러 겹으로 붙여 질식사시켰던 것이다. 이곳이 백지사터로 또 하나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이처럼 깊은 신앙심을 남겨주었던 백지사터와 숲정이는 1980년대 초에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1983년 5월 10일 천호산의 순교자 유해를 발굴하던 중 모든 얼굴이 땅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당시 역적죄인은 죽어서도 하늘을 우러러 바라볼 수 없다는 풍습 때문이었다.
여산 동헌에서 내려다보이던 숲정이성지는 현재 논으로 변하였고, 일부만 남아 순교지로 가꾸어져 있다. 순교자들의 시신 중 일부는 인근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있는데 이를 가리켜 천호성지(天呼聖地)라고 한다.
천호성지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에서 순교한 이명서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한재권 요셉 등 4명의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아우구스티노가 안장되어 있다. 또 1868년 겨울 여산에서 순교한 야고보 김성화 외 9명의 무명 순교자무덤도 같이 있다. 최근 들어 천주교 신자들의 순례지인 천호성지 옆에는 일반 천주교신자들의 납골당도 만들어 안치하고 있다. 그리고 기도하고 죄를 벗어나고자 하는 피정의 집도 지었다. 피정의 집은 예배를 보고 공부도 하는 데, 세상의 시끄러움을 피하여 고요히 사는 것을 말한다. 글자 그대로 세상의 죄악과 타락한 곳을 떠나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고 천주님을 부르는 것을 뜻함 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천주교상 성인은 103위에 달한다. 그러나 이분들과 버금가는 분들 125명을 더 기리기 위해 추가로 성인추대 품의를 진행 중이다.
숲정이성지 인근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장소가 여럿 있다. 우선 지척에 여산성당이 있으며 백지사지와 천호성지가 있다. 여산성당은 용안의 화산천주교회보다 유명하지 않지만, 그래도 여산의 순교지를 만드는 복음의 산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산성당의 최초는 1886년 성치골로부터 시작된다. 1887년 ‘시오목’공소가 되었다가, 1897년 나바위성당이 건립되자 나바위성당에 속한 여산공소가 되었다. 1951년 여산이 성지(聖地)로 확정되자 여산성당의 분리를 주장하여, 1958년 10월 21일에 성당봉헌식과 교리실 1동의 준공식을 가졌다. 이때 300여명의 예비신자가 대기하고 있었고, 1959년 1월 17일 여산성당은 벌써 신자가 900여명에 달했다.
여산성지의 결정 후에도 오랫동안 개발이 늦어졌으나, 1981년부터는 부지매입이 시작되었으며, 1982년 3월 13일 재대와 축대를 세우고 5월 20일에는 계단과 예수성심상도 완성되었다. 1983년 12월 16일 백지사터를 매입하고, 1985년 3월에는 숲정이성지에 십자가를 세웠다. 1986년 4월 14일 여산성지봉헌식을 마치고 천호성지까지 도보순례를 떠나니 무려 3,000여 신자가 따랐다고 한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2009년 10월 31일에 다시 이 길을 걸으려 하고 있다. 나바위성당, 여산숲정이, 백지사지, 천호성지, 미륵사지, 어우리삼거리, 송광사, 전동성당, 전주숲정이, 치명자산성지까지의 순례지를 잇는 도보길을 만든 것이다. 성지순례라는 것이 원래는 가는 것부터 고행이며 모든 과정에 시련이 따르는 것이기는 하지만, 현대와 같이 바쁜 일상에서 일부러 만드는 순례코스는 신도들에게 좋은 반응을 보일 것 같다. ‘평화의 순례길’ 개통식은 09:00에 경기전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종교의 신앙은 죽음을 대가로 하여 얻어지고, 민주주의와 자유의 쟁취도 역시 피의 대가로 얻어짐을 알 수 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때에 이를 진압하던 군인들은 금마의 특정부대에 주둔하면서 필요시마다 파견되었었다. 6월 25일 여산성당 금마공소에서 미사를 마치고 귀소하던 박창신신부는 사제관에 숨어있던 4명의 괴한에게 무차별 테러를 당하였으며, 현재는 익산모현성당에서 시무중이다. 그것은 목회자가 보는 입장에서 진압대의 행태가 반인륜적이라는 발언을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들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내용과 진압에 대한 그들의 부당성을 고발하자, 그것이 곧 어느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여산성당은 2006년부터 이상섭신부가 집례하고 있다.
이렇듯 백지사지(白紙死址)와 여산성당, 그리고 천호성지(天呼聖地) 피정(避靜)의 집을 비롯하여 숲정이순교지에 대한 가치평가는 고귀한 생명을 담보로 하는 거룩한 믿음의 장소였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
익산투데이 2009.10.28 게재
'내 것들 > 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송병우의 왕궁저수지완공기념 별장, 함벽정(涵碧亭) (0) | 2009.11.12 |
---|---|
6. 호남지방의 유일한 석회동굴, 익산천호동굴(益山天壺洞窟) (0) | 2009.11.04 |
4.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 ㄱ자교회인 두동교회 구본당(杜洞敎會 舊本堂) (0) | 2009.10.22 |
3. 미륵사 창건의 단초가 된 사자사지(師子寺址) (0) | 2009.10.16 |
2. 편안하고 아늑한 중세 율촌면이었던 율촌리고분군(栗村里古墳群) (0) | 2009.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