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3. 미륵사 창건의 단초가 된 사자사지(師子寺址)

꿈꾸는 세상살이 2009. 10. 16. 11:20

사자사지(師子寺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609-1번지 경사면에 사찰이 있는데, 2000년 3월 31일 시도기념물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일대 1,150㎡가 사자사의 소유로 되어있다. 미륵산 정상의 8부 능선에 있는 사자사(師子寺)를 지칭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로, 현재도 운영되는데 사자암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 무왕조 편에는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사자사에 기거하였다고 전하며, 산 아래에 있는 미륵사가 639년에 창건된 것보다 먼저 있었던 사찰이다. 백제의 무왕과 선화비가 사자사로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륵사 창건의 계기를 마련해준 점에서 백제 불교사상 중요한 이 절의 위치에 대하여 논란이 있어왔다. 하지만 1992년 법당을 확장하기 위한 발굴조사에서 기와조각들이 발견됨으로써 백제불교사적 의미를 가진 사자사터임이 확인되었다. 그 후 1993년 2월 23일부터 3월 24일까지, 1993년 5월 4일부터 8월 3일까지 2차에 걸쳐 조사하였다.

모두 5차례의 시기를 달리하는 유구들이 발견됨으로써 오랜 역사를 가진 사자사임을 증명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유물로는 백제시대의 평와와 막새류부터 통일신라 시대의 ‘금마저성(金馬渚城)’ 명문와, 절대시기를 알 수 있도록 연대를 기록한 명문와 등이 유구별로 다량 발견된 것이 특징이다.

1차 건물지는 맨 나중의 것을 말하며, 1992년 철거하기 전까지 사용하던 정면 4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이었다. 일반주택 모양을 한 법당과 마루, 부엌과 방이 있었다. 상량목에는 순종2년 1908년으로 ‘황제즉위2년술신(皇帝卽位二年戌申)’이라 적혀있음은 1894년 동학혁명으로 불탔다가 재건된 것이며, 또 1956년이라고 쓴 묵서(墨書)도 있어 개축된 것을 알 수 있다.

2차 건물지는 1차보다 30cm아래에 위치하며, 건물지는 거의 훼손되었고 기단석축 일부가 남아있다. 초석이나 적심석이 보이지 않아 규모와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우나, 서남쪽에서 온돌시설로 보이는 고래와 연도가 확인되었다. 기단토에서 ‘지치2년사자사조와’(至治二年師子寺造瓦)라 새겨진 휘안문 암막새 기와가 발견되어 1322년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3차 건물지는 2차 건물지 밑에서 일부만 노출되었다. 중앙에 법당, 동서로는 승방시설과 요사채를 겸한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나 시기는 알 수가 없다. 와편이나 청동보살입상, 금동신장상, 금동탑상륜부, 청동탑상륜부, 옥개파편 등이 출토되었다.

4차 건물지는 1차 건물지 철거 전의 법당지를 포함하여 석탑이 놓여있던 마당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현재 건물들로 인해 정확한 조사는 불가하였으나 크기가 10cm내외의 청동약사여래입상, 청동여래입상, 청동탑상륜부, 청동추 등이 출토되었다. 또 ‘천력3년’(天歷三年) 1330년, ‘성화20년’(成化二十年) 1484년, ‘가정22년’(嘉靖二十二年) 1543년, ‘만력2년’(萬曆二年) 1574년 등의 명문와가 발견되었다.

5차 유구는 4차 유구를 자세히 조사한 결과 동서 연결축대와 중정 하층에서 확인된 동서 축대 및 계단시설, 축대 동쪽 요사채의 서남쪽 기단 축대가 확인되었다. 상중하 크게 세 단으로 구성된 석축으로 대지를 조성하였으며, 중단과 하단에서 일부의 건물지 흔적이 남아있었다. 출토 유물로는 미륵사지에서 출토된바 있는 중판연화문(重辦蓮花紋) 수막새, 단조문(端鳥紋) 암막새가 수습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제 향로 등이 출토되었다.

제6차 시설 여부를 조사하였으나, 더 이상의 정확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또 다른 동서 연결용 축대와 이 축대를 보호하는 보조축대가 있었음은 확인되었다. 현재의 가장 위쪽에 있는 토양에서는 5층 정도의 퇴적층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토층들은 해무리굽 청자층과 통일신라시대의 와편 및 토기편층 두 갈래로 구분되어 있었다. 현재 낙석되는 상단면에는 너비 14cm, 길이 15cm의 커다랗게 정다듬한 홈이 있고, 양쪽으로는 지름 3cm정도의 작은 홈이 있어 어떤 시설물이 있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이는 사자사의 위치가 미륵산의 상부쪽 중턱에 있어 산허리를 깎아 평지를 만든 절터였기에 인공적인 석축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절터는 지금도 매우 협소하며 동서로 길게 늘어선 모양을 하고 있음이 그 증거다. 사자사는 몇 차례의 중건과 신축을 거쳐 초기의 옛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현재는 1994년에 개축하여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과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그리고 창고 등이 있으며 대웅전 앞에 석탑 1기가 남아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현재 이 사자암내에는 높이 276cm의 석탑이 있다. 원래는 30여m 쯤 떨어진 앞길 동편에 있었으나 옮겨졌다고 한다. 이 석탑은 크게 기단부와 탑신부만 남아 있는데, 석재의 크기, 양식 등으로 보아 석탑과 석등을 혼합한 서로 이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맨 위의 지붕돌은 상․하가 뒤 바뀐 채 거꾸로 놓여있다.

사자사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매우 급하며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려 험악한 산세를 나타낸다. 입구에서는 케이블카와 모노레일이 설치되어있어 그 정도를 설명해주고 있다. 게다가 과거에 석축을 쌓았던 돌들이 무너져 내려 걸어가는 것마저 위험하기만 하다. 인근에는 더러 넓은 평지도 있건만 왜 이리 경사가 급한 곳에 절을 지었을까 궁금해진다. 혹시 바로 뜨는 태양을 직접 만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미륵산의 미륵부처가 바로 임하도록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절을 짓다보니 그랬던 것일까.

사찰에서 도를 닦고 수양을 하기도 전에, 사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양이 되라는 의미의 배려는 아닐지 모르겠다. 일반 처사들이 산에 오르는 고행만으로도 자신을 돌아보고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갔는지, 자기 수양중인 흰둥이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정말이지 평일 오전인데도 산에 갔다 오는 사람들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인다. 개는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세상을 달관한 듯하지만, 스님도 누가 법당을 기웃거리든지 말든지 목탁을 두드리며 오로지 경을 욀 뿐이다. 서있는 사람은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갈테면 가고, 올테면 오라는 신호였다.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도를 구하러 가다가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이처럼 도를 구하러 가는 길은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었다. 길을 가는 과정 자체가 바로 도를 닦는 것이었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여기 사자암의 주지승 향봉스님도 인도에서 숱한 역경을 이겨내었으며, 티베트와 네팔, 중국 등지에서 15년이나 구법을 위해 노력한 분이시다.

오봉산 청평사, 고령산 보광사, 내장산 내장사의 주지 등을 역임하셨고, 조계종의 중앙부처에서도 활동한바 있다. 그런 스님이 지적하는 바는 우리의 언행이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와 말이 곧 우리 몸의 표현이니, 함부로 행해서도 안 되고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설파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맑고 바르게 하여 중도를 이루어야 한다고 한다. 일찍이 임제선사가 설파한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은 어디에 있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세상의 중심에 서있는 내가 곧 세상의 주인이 되는 지경을 뜻한다고 전한다.

향봉스님의 저서로는 ‘사랑하며 용서하며’ 등 20여 권이 있다.

미륵사 창건 당시 사자암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미륵사지 석탑은 639년에 축조되었으며 붕괴의 위험이 있어 2009년에 완전 해체되었는데, 이런 때에 사자암이 가지는 의미는 어디까지일까 생각해본다. 혹시 미륵사 복원에 어떤 중대한 역할은 없는지 관심을 가져 볼 일이다.

==========================

 

 

 

 

 

 

 

 

  

  

 

  

 

 

  

   

   

익산투데이 2009.10.14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