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2. 편안하고 아늑한 중세 율촌면이었던 율촌리고분군(栗村里古墳群)

꿈꾸는 세상살이 2009. 10. 16. 11:17

율촌리고분군(栗村里古墳群)

 

전라북도 익산시 황등면 율촌리 산4번지에 오래된 무덤이 있었으며, 이 일대는 전주이씨임영대군정간공파홍익송학동종중의 소유로 3,669㎡가 2000년 6월 23일 시도기념물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은 1997년 4월부터 1998년 3월까지 익산시 문화유적 분포도를 작성하기 위한 조사에서 확인된 것으로, 황등면 율촌리 율동마을에 있는 낮은 구릉의 정상부의 무덤 5기다. 봉분은 높이가 1m 정도이며 길이는 13m 내외의 네모꼴인데, 시기는 약 3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3세기 무렵이라는 말은 백제의 세력이 지방 구석구석까지 완전한 체제를 갖추기 전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1998년 5월 15일부터 6월 25일까지의 1차 조사에서 1호분과 2호분이, 1999년 5월 18일부터 6월 30일까지 2차에서는 비교적 분형이 완전한 3호분과 5호분이 조사되었다. 그 결과 분구와 주구내(周溝內)에서 독무덤(甕棺墓)) 12기, 돌널무덤(石棺墓) 6기, 널무덤(土壙墓) 2기가 확인되었다. 이 무덤은 마한의 지배계급층 무덤으로 추정되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또한 무덤주변에 구덩이를 돌려 판 주구무덤 형식은 고대 일본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이 유적에서 확인되는 1봉토(峰土) 다장(多葬) 형식과, 방형분구(方形墳丘)의 조성 등은 나주 복암리(伏岩里) 고분에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제1호 고분에서 보면 어떤 분구는 매장한 흔적이 없는 것도 있어, 분구를 먼저 만들어 놓고 나중에 대상자가 죽으면 매장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2호 고분은 옹관묘와 석관묘가 섞여있는데, 옹관묘 주위에 둘러져 있는 석관묘는 옹관묘를 보호하기 위하여 추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3호 고분에서는 옹관묘와 토광묘(土壙墓)가 발견되었는데, 토광묘는 내부에 무문토기류를 깔아 놓은 것과 깔지 않은 것이 공존하고 있었다. 또 발견 유물로는 토기와 유리, 옥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의 석관묘층 위에 분구(噴丘)와 성토(盛土)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제4호 고분은 현재 다른 묘의 월연(越燕)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5호 고분에서는 옹관묘층 아래에서 석관묘가 발견되었는데, 석관묘에서는 덮개석과 벽석(壁石)이 유실된 묘도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석관묘는 매장 후에 성토를 하여 분구를 만드는 방법이었으며, 세월이 지난 후 그 위에 다시 묘를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황등면 율촌리는 예전에 익산군 율촌면이었던 시절이 있다. 물론 조선시대 이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익산군은 현재의 금마면이며, 율촌면은 황등면 율촌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과거 율촌리에서 집단을 이루고 살았던 연유로 율촌리고분군이 생겨났다는 중요한 단초로 짐작하게 한다. 기록으로 전하는 내용은 정확하게 찾지 못했지만, 1834년의 청구도를 비롯하여 19세기 전기의 동국여도, 1861년의 대동여지도, 1871년의 호남읍지, 1896년의 전라북도각군읍지, 1899년의 호남읍지 등에 율촌면이 표기되어 있으며, 황등면이라는 지명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율촌면은 당시 미륵산의 서쪽이며 함열과 용안, 그리고 임피와 춘포의 사이에 위치하는 평야를 지칭한다.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이 일대에 황등제가 있었고, 연계하여 유방평(流芳坪)이라 부르는 넓은 옥토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청구도에서는 율촌면을 중심으로 남일면, 남이면, 지석면, 기산면, 춘포면 등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국여도를 보면 삼기면이 분리되었지만, 그 후에는 교통의 발달로 행정구역이 단순화되는 경향을 보여 남일면과 남이면, 삼기면 등이 율촌면으로 통합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율촌리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지나서 더 가야하는 마을이며, 내 딴에는 아주 먼 곳으로 여겨왔다. 나는 학교를 중심으로 율촌리와 반대방향에 살았던 탓에 율촌리를 항상 남의 동네로 구분짓는 선입관이 있었다. 그 이유는 학교가 마을의 중앙에 있지 않고, 북쪽 변두리에 있었기에 학교를 벗어난다는 것은 외지로의 여행이나 다름없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율촌리에 살던 친구들은 관공서나 역, 그리고 버스를 타려해도 항상 마을로 내려와야 하였으니 나는 복 받은 곳에서 살았던 셈이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율촌리는 고구마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주변은 온통 황토밭 야산인데다가 거주 인구는 많지 않았으니, 일손이 조금가면서 병충해도 없는 고구마가 제격이었다. 그런 고구마는 가을내내 황등역으로 모여 쌓이기 시작하였다. 역 광장은 물론이며 주변 석공장의 돌 위에도 고구마가 산을 이루었다. 고구마는 가을 한철 홍수출하가 되었지만, 주정용 전분사용은 일년내내 이루어졌으니 봄이 올 때까지 눈보라를 맞으며 순서를 기다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내가 처음 가본 율촌리는 논이 있고 인적은 드문 그런 시골이었다. 초등학교 어느 여름 날, 남학생들은 단체로 오래달리기를 하였다. 교통량도 적고 인적이 드문 율촌리까지 대략 2km 남짓한 거리였다. 멋모르고 재잘대며 시작한 달리기였지만 목적지를 가기도 전에 벌써 땀은 비오듯하였고 숨도 가빠졌다. 어쩌다 털털거리는 차라도 지나갈 때면 땀에 젖은 옷 위로 하얗게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타들어가는 갈증이었다.

반환점을 돌아 달리던 아이들이 갑자기 하나 둘 허리를 굽히고 물을 마셔댔다. 그러나 거기에는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주는 아가씨도 없었고, 두레박에 물을 떠주는 아저씨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땅맛을 안 벼가 있었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르는 수로뿐이었다. 우리는 허리를 굽힌채 그렇게 냇가의 물을 마시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목을 적시긴 하였지만, 그래도 개운치 않은 물맛이었다. 만약 선생님이 시원한 우물물을 준비하였었더라면 아마도 그것이 바로 꿀맛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남을 위한 배려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효과가 나는 것인데,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 시절이 서운하기는 하다.

가끔 지나가는 율촌리는 그런 추억을 되살려준다. 예전의 논바닥을 찾다가 눈을 들어보니 작은 동산이 보이는데, 그곳에 바로 율촌리고분군이 있다. 길가에는 고분을 알리는 간판이 없으니 가늠하기는 어려우나, 아가페정양원의 네거리에서 대각선으로 도로건너에 있는 언덕이라면 누구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대가 사유지인 관계로 발굴조사 후에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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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09.10.07 게재